아침에 해뜨는 방향으로 걸어 산책을 한다.
그러면 부산의 두번째로 높은 장산을 마주보며 걷게 된다.
오늘은 구름이 잔뜩 끼고 바람이 많이 불어온다.
날씨가 어두워지니..... 어두웠던 기억이 떠오른다.
고삼기억........
누구에겐 아름다운 학창 시절이었겠지만....
나는 전혀 아니다.
처음에는 동래에 있던 여고를 다니다가
학교가 멀리 구서동으로 이사를 가버려서
가깝던 학교가 엄청 멀어져 버렸다.
버스를 한참 타고 가야 하는 학교...
새벽... 늘 해가 뜰 무렵 버스를 타야 했고...
버스를 타고 가면... 지금은 아파트 단지로 변했지만...
당시 연탄 공장을 지나가면서 장산 해뜨는 풍경을 거의 매일 봤었다.
시꺼먼 연탄재 산더미들 뒤에 큰 장산 더미... 그리고 또 솟아 오르는 붉은 해.
검은 색 배경에 붉은 하늘이 펼쳐지다가 밝은 빛이 비치기 시작하면서
힘겨운 하루가 시작 되는 것이었다.
그때는 참아야만 되는 시기였고...
아우슈비츠 수용소 가는 심정이 되었었다.
왜냐하면 고1,2학년때는 저녁8시까지
그리고 고3 1년은 강제로 학교에 10시까지 남아서 공부를 해야했고....
그야말로 자유를 빼앗긴 채 감옥에 갇힌 듯했다.
자유에 집착하던 나는 누가 시키면 잘 하지 않는 그런 성질이었었다.
시키면.... 안할뿐 아니라... 딴 짓을 더 많이 하는 청개구리...
그래서 고3때는 티비를 많이 봤었다.
짬짬이 보던 티비는 얼마나 달콤하고 재미있는지....
고3 이었던 88년도에 봤었던 티비 프로들이 가장 재미 있었다.
틈틈히 올림픽 경기도 봤었고.... 안볼래야 안볼 수가 없었다.
미드 미니시리즈....돈 존슨의 더 롱 핫 써머...( The long hot summer )
돈 존슨에게 마음을 다 빼앗겨 버렸다.
베스트셀러극장의 샴푸의 요정.... 홍학표, 채시라가 나온.... 넘 잼났던....
티비 영화 이스탄불의 사나이.... 나중에 터키 여행을 하게된 씨앗....
뿐만 아니라... 최애 듀란듀란...조지마이클.시카고... 글로리아에스테판, 데비깁슨 등 귀와 눈을 사로 잡던 수많은 팝송들...
정말 신기하다.
딱 고삼때 봤던 티비프로들이 가장 재미있고.... 아직도 생생히 기억이 넘 잘 난다.^^
고삼 10월까지는
그야말로 시체처럼 좀비처럼 학교만 왔다갔다 하고
자율학습이라 이름붙인 강제 학습시간에는 상상의 나래를 펴고
혼자만의 세상에서 살았었다.
그러다가 감시 선생님의 발걸음소리에 깜짝 놀라곤 했었다.
그렇게나 고집스럽고.... 호불호가 강하던 나를.....
강제로 강제로 자리에 앉혀서 3년간 묶어두었더니....
하루 하루 정말 시들어가는 꽃처럼...
빛도 잃고.... 방향도 잃고..... 그냥 저냥 시간만 지나가길 바라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이 감옥을 어떻게 탈출해야하나???
차분히 생각을 해보았다.
이렇게 혼자만의 세상을 그려가다가는 내년에 또
재수를 해서 또 1년 감옥생활이 연장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자
정신이 좀 돌아오고....
혼자만의 세상을 일단은 살짝 포기를 하고
세상에 순응을 하면서....
이 감옥을 탈출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한달 남은 대입시험까지 공부에 몰두해보기로 했다.
한달도 아니었고.... 정확히 22일이 남았었다.
우선 시간 계획표를 짰다.
공부를 할 수 있는 시간은 수학에만 쏟아 부었다.
원래 수학을 못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너무나 손을 놓아버려서
성적 편차가 엄청났고.... 좋아하는 부분만 잘하고 관심없는 부분은 아예
포기를 하고 있었다.
버스에서는 영어단어를 외웠고....
각 학과들 사이 쉬는 시간에는 국사, 세계사, 사회, 도덕, 지리, 등등 암기과목을
월, 화, 수, 목, 금, 토 날짜별로 반복했다.
수학 문제집 한권, 영어 문제집 한권, 있던 문제집들 중 젤 맘에 드는 문제집
각 한권씩을 뽑아서 수차례 반복해서 계속 풀었고...
오답들만 체크해서 또 풀고 또 풀어서 너덜 너덜 해졌다.
대입 시험까지 22일 남은 기간 울 동네 독서실을 자발적으로
처음 끊어봤다.
고삼 10시 자율학습이 끝나고 바로 독서실을 가서 하루 공부
마무리 하고 12시 반이 되면 아버지가 독서실로 나를 데리러 오셨다.
처음에 하루 이틀이 지나고....
어....... 이상하다.
재미라는 친구가 슬슬 찾아온다.
영어 단어도 쉽게 외워지고....
짜투리 시간들 동안 조금씩 읽어보는 세계사, 국사, 넘 재미있다.
겨우 10분동안 조금 읽고는 다음 이야기가 기대 된다.
수학문제들이 하나 하나 풀리기 시작한다.
미분은 쉬운데.... 적분이 좀 어려웠었다.
아..... 미분들의 기울기가 적분의 테두리였구나....
미분의 위치가 적분의 면적이었구나....
하나하나 깨쳐가는 즐거움이 들었다.
쏟아지는 즐거움에 잠이 오지 않았고....
공부시간은 점점 놀이시간이 되어 길어져갔다.
아버지는 독서실 밖에서 점점 더 나를 기다리셔야 했다.
아.......
공부가 이렇게 재미있는 것이었구나.....
딱 1주일만 더 주면 서울대학교도 가겠구나 싶었다.
우리가 대학시험을 칠때는
원서를 원하는 학교에 먼저 내고
후 시험을 치는 방식이라.... 아무리 성적이 좋아도 더 좋은 학교를 갈 수는 없다.
그냥 소신껏 원서를 적어서 원하는 학교에 제출을 하고
그 학교에 가서 시험쳐서 입학 당락을 결정 짓는 것이었다.
지금은 수시니....정시니.... 대학교 들어가는 방법도 많다.
그게 더 좋을 수도 있지만.... 나는 그냥 우리 때가 좋은거 같다.
학교 학과만 한번 정하고 나면.... 아무 신경쓰지 않고 공부에만 전념해서
시험만 잘 치면 되는것이다.
전혀 입시 준비에 머리를 굴리면서 신경을 쓰지 않고...
못 먹어도 고!
어떤 일을 하더라도
몰입이라는 친구를 만나면...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는 것을 고삼때 깨우쳤다.
그렇게 지겹고 지긋지긋하고 싫었던 고삼 학창시절을
22일간 단번에 행복한 고삼 마무리 시절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깨쳐가고 배워가는 기쁨을 맛보니
얼굴도 환해지고....
까칠하게 고삼 유세 떨던 내가 나도 모르게 부드러워져 갔다.
시험날이 왔다.
엄청 춥다.... 무지무지 춥다.
시험장은 게다가 지하실이다.
창문틀은 낡아서 닫혀있지도 않다.
설상가상 내자리는 창가자리 맨 앞자리다.
오전 시험이 시작 되었다.
수학이 엄청 어렵게 나왔다.
그래도 무사히 쳤다.
오전 시험을 마치고 점심을 먹었다.
엄마가 춥다고 따뜻한 커피를 항그 타서 보온병에 따시게 넣어주셨다.
따뜻하게 잘마셨다.
오후 시험 시작 종이 울렸다.
영어 시험이다.
아......큰일이다.
커피를 넘 많이 마셨다....
화장실 가고 싶다.
글자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래도...... 영어 지문이 아는 내용들이다.
Hotel California.
이글스 노래 호텔 캘리포니아 내용이다.
뿐만 아니라 영어 지문들중 어려운 단어들은 있지만...
내가 아는 내용들이라 쉽게 답을 맞출수 있었다.
오줌통이 터질듯 하면서도 영어 시험을 잘 봤다.
그리고 웃음이 났다.
공부 안하고 늘 별밤 라디오 듣고 빌보드 챠트 외워가면서
팝송 좋아 하던 것이 대입시험에 도움이 될 줄이야....^^
89학번들중 혹시 시험 문제를 기억할 친구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화장실 참아가는 고통속에서 울다가 웃다가 영어 문제를 풀어서
넘넘 기억을 잘 하고 있다.
결과는 역시 합격이었다.
나의 공부하는 꼴을 보시던 울 가족들은 나를 믿지 못하신 분들이 많다.
특히 우리 할머니....
고삼이가 할머니방에서 티비 삼매경에 빠진 모습만 보셨으니...
그때 얼마나 애가 타셨을까 싶다.
하지만... 나를 늘 독서실 데려다주시고 데리고 오시던
울 아버지만은 나를 믿고 계셨다.^^
오늘 아침
하늘에 꽉 끼어있던 구름도 많이 흩어져서
파란 하늘이 나타난다.
환경이 행복을 좌우하지는 않는다....
그 세상, 환경을 내가 받아 들이는가? 거부하는가??
어떤 환경이라도...
받아 들이면 천국이 될 수있고.... 거부하면.... 지옥이 될 수있고...
내가 선택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당연히 천국을 선택해야지....
어떤 상황에서도 행복은 자기가 하기 나름이라는 것.
그리고 그 행복은 내 마음속에서 찾고 나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고삼 달빛을 만나서 배운다....
This could be heaven
And this could be hell - 호텔 캘리포니아 가사중에서...
이것은 천국이 될 수도 있고.... 지옥이 될수도 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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