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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막내동생 이야기.5

달빛7 2020. 2. 16.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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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에 들어서자 신형 원자폭탄이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떨어졌다.

수 많은 희생자가 나온 것을 알았다.

다음은 동경중심지에 떨어지게 된다는 소문이 퍼졌다.

하지만 원폭이 떨어지기 전에 무조건 항복을 했다고 한다.

8월 15일 천황은 일본은 군국주의에서 평화주의로 옮긴다고 말했다.

어린 나는 일본이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천황방송후 선배들로 부터 절대로 바깥으로 나가지 말라고 엄하게

말을 들었다. 과거 대정12년 관동 대지진때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넣었다는

유언비어가 퍼져 자경단에 의해 6000명 이상의 조선인이 학살 되었었다.

요코하마에서도 2000명 이상이 학살 되어 그 위령비가 보생사에 건립되었다.

15년전 그 무연불(연고지가 없는 묘지) 한국의 천안에 있는 망향의 언덕에

이장했다.

내가 민간인 단체 가나가와 현의 본부 감찰 위원장때 일이다.

만일 전쟁에 져 자경단이나 제대한 군인이 우리를 습격해왔을지도 모른다.

모두 커다란 불안을 느끼면서 일주일 정도 집에서 한걸음도 밖으로 나가지 않고

방에 틀어박혀있었다.

일주일 경과 후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처음으로 외출했다.

공장은 폐쇄되어 직원들은 식객으로 있었지만 1개월이 지나면서 해산하지 않으면

안되어 기숙사에서 나왔다.

동포 김산씨네 비어있는 2층을 친구 타카하시군과 빌리기로 했다.

나는 타카하시군과 함께 중고 자전거를 구입하고 이바라키 명물인 곤약을

사들여 동경의 오뎅집에 팔러갔다.

어느때는 집주인 김산에게 이끌려 소명항까지 가서 생선을 매입해서 행상을 했다.

행상은 돈이 되지 않았다. 쌀을 살수가 없을때 한번에 많은 감자를 재배할 수 있어

전쟁중 정부가 장려했던 농림 1호라는 싱겁고 맛없는 감자만으로 몇일을 지내는

경우도 있었다.

김산씨의 부인은 가애상이라고 불렀는데 남편이 외출하면 우리에게 몰래 밥을

2층까지 올려주었다. 점점 나는 다시 영양실조가 되었고

무서운 병마에 습격당했다.

열은 매일 42도 43도를 넘나 들었다. 주인 김산씨 댁에 상비하고 있는 약은

열을 식히는 이상의 효과는 없고, 또 얼음으로 아무리 식혀도 열은 식지 않았다.

근처에 살고 있는 원래 공장의 사무원 국강씨가 아침저녁으로 마을까지 가서

얼음을 사가지고 오고 열심히 간병해 주었지만 병은 점점 더 악화 되었다.

김산씨와 부인도 걱정으로 여러가지 손을 써 보았지만 조금도 좋아지지 않았다.

게다가 의식이 없어 죽었다 라고 생각되기도 하고 그러다가 또 의식이 돌아오고...

그것이 반복되었다.

마을 의사에게 긴급왕진을 받고 진찰하니 의사도 매우 놀라서 돌아갔다.

이윽고 보건소 직원이 몇명 와서 장티푸스라는 전염병이기 때문에 곧 격리 시키지

않으면 안된다고 데리고 갔다.

보건소 직원이 올때 쯤은 완전히 의식을 잃고 죽은것 같은 상태였다.

보건소 직원들은 김산씨에게 이미 죽었으니 소독하고 돌아가라고 했다.

그러나 12월 부터 앓아서 3개월이 지나 회복했다.

거울을 보자 머리는 완전히 빠져 대머리였다.

눈썹까지 완전히 빠져버렸다. 나는 김산씨와 친구들의 따뜻한 간병으로 다시

남은 생을 보낼 수 있었다.

큰 병에서 해방되자 이제는 새로운 직업을 찾아서 살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때쯤 수해도에서 소개되었던 오카무라 제작소의 형이 경영하는 공장이

폐쇄된 후 지인인 차식의씨가 공동사업으로 이 공장을 빌려 개업하고 있었다.

공원 20명 정도로 작은마을의 공장으로 전구 속의 니크롬 선을 제조하는 공장

이었다.

공장을 시작했던 당초 번성했던 것 같이 군수공장에서 점점 평화산업으로

변화와 함께 이 공장도 경기가 안좋아 임금의 지불이 늦어지게 되었다.

그래도 일이 없었기 때문에 얼마간 일했다. 차씨나 부인도 인품이 좋아 주위

친구들로 부터 사랑을 받았고 나를 동생같이 귀여워 해줬다.

그 즈음,

조국은 남과 북으로 38도 선으로 분단되어 북을 지지하는 재일본조선인연맹(조련)과

남의 자유주의를 지지하는 조선건국촉진청년동맹(건청)과의 세력다툼을 하고 있었다.

북을 지지하는 조총련쪽이 꽤 많았다.

우리들은 그들에 억압당하여 그들의 집단에서 우리들의 사무소를 쳐들어와

망가뜨리고 간판까지 떼어갔다.

그때문에 밤에는 집에 간판을 들고 돌아가기도 했다.

어느 날 우리들은 복수를 하기 위해 40명 정도의 청년들이 수해도 지부 사무소에

모여 미토의 조련사무소를 습격하기로 했다.

지부장은 김교안씨였다. (김씨는 후에 민단 강동지부장단장을 두번 역임했다.)

아직 30살 갓 지난 두려움을 모르는 지부장이다. 나는 지부의 조직부장으로 임명

되었다.

트럭 두대에 나누어 타고 미토시 조련 사무소로 향했다.

사무소 가까이 내리기 시작하자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많은 미국 MP(미국 육군의 헌병)들이

 뛰어 들어왔다.

총을 겨누고, 지금 당장이라도 쏠 것 같았다.

뭔가 말하는 듯 고함을 지르고 있지만 영어를 전혀 모르기 때문에 나는 도망가지

못하고 트럭밑에 숨었다. 반정도는 삼삼오로 흩어져서 도망갔다.

나와 몇명은 트럭밑에 숨었지만 발견되어 총을 겨누어 끌려 나왔다.

이윽고 경찰관 몇명이 달려왔다.

경찰서에 가서야 비로소 우리들은 그들에게 당했음을 알수 있었다.

내부사람이 사전에 습격하러 가는 것을 그들에게 밀고했기 때문에 그들은 역으로

대응했고, 공산계의 무법자들이 습격하기 어렵자 미군에게 연락을 했던 것이다.

한걸음만 잘못하면 인명피해가 일어날 위험한 일이었다.

그 후 항상 그들과 트러블이 계속되고 쌍방에서 부상자나 희생자가 속출했다.

이대로라면 학교에도 갈 수없게 되고 장래 희망도 없어진다. 어떻게든 도시로 나와

학교에 가야만 했다.

우연히 아는 사람이 요쿄하마에 있는 것을 알고 그곳을 방문하기로 했다.

 오오지로라는 선배가 있어서 요코하마로 갔다.

도중 신바시역에 내려보니 한쪽이 불탄 들판이 되어 있고 역전에는 마켓이

즐비하고 아주 북적거려 실업자, 군인, 학생들이 넘쳐났다.

옛날의 신바시의 모습은 남아있지 않았다.

요코하마의 학견마을은 학견천을 따라 작은 판자집들이 이어져 있었다.

20에서 30채 정도 판자촌이다. 지인인 오오지로씨의 아내는 일본인 준꼬씨였다.

그는 소주를 밀주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지시를 따라 다음날 부터 소주제조를 돕기로 했다.

학견부락은 역에서 걸어서 10분정도 거리이고 강은 언제나 큰 바다로

흘러가고 있다. 바다 근처이기 때문에 바닷물이 흘러들어와 수량은 만조, 간조에 의해 변할 뿐이고

 아무리 큰비가 내리더라도 물이 넘치지 않았다.

당시에는 술이 부족하여 알콜로 제조한 음소주도 날아갈듯 팔려 나갔다.

대부분이 공업용 알콜이기 때문에 메칠이 혼합되어 있는 경우도 있고, 사전에

약국에서 검사해서 제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검사하지 않고 제조했던 소주에

의해 실명하거나 사망했던 사람도 끊이질 않았다.

술을 좋아하는 오카무라 제작소의 사장 형제 둘은 함께 메칠 알콜이 혼합된 소주를

마시고 사망했다고 한다.

몇개월간 돕고 있는 동안 매입에서 제조까지 완전히 다 알아버렸기 때문에

친구 야마모토군과 둘이 독립해서 제조 판매하기로 했다.

우리는 메칠등으로 실명시키거나 사망시키기라도 하면 힘들어 지기 때문에

브로커에 예약하고 정규품만 취급하기로 했다.

판매장소도 한군데로 정했다.

당시 사쿠라마을의 강 주변에는 수백채의 판자집이 세워져있고 강을 사이에 두고

판자집들이 마주보고 있었다. (지금은 강을 매립해 새로운 길이 되었다.)

역전과 야모거리의 모퉁이에 커다란 대중 술가게 오오쿠로가게가 있고 아침부터

밤까지 항상 몇십명 손님이 오고 오뎅을 안주로 술을 마시고 소란스러웠다.

거기가 단골집이었다. ( 지금 그 장소는 관광호텔로 되었다.)

술집 주인은 술가게에서 사들인 술과 비교하더라도 완전히 다른점이 없고 싼 가격이었기 때문에

 가지고 가는 소주 전부 사주었다.

모처럼 단골집에서 거래가 정지되지 않도록 늘 정품과 비교하며 도수에도 신경쓰고 맛을 음미하면서

 제조품 전부를 오오쿠로가게로만 팔았다.

밀조술만들기는 법령위반이어서 하루빨리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하고 싶은 죄악감에 쫓기었다.

그 당시 명대 야간에 다니고 있던 김재광씨는 나와 특별히 친해서 나의 학교문제에

대해서 신중히 생각해 주고 여러가지 아르바이트를 하게 해 주었다.

전쟁중 과는 달리 영어를 알지 못하면 안되었다.

그는 법학부이다.

먼저 내가 단기 대학에 들어가도록 장려해 주었고, 단기대학은 희망자가 적어서

어느정도 학력만 있으면 입학 할 수있었다.

게다가 영어와 내가 가장 자신 있었던 수학을 배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공업학교 당시 자신있던 수학은 이젠 다 잊어 버렸다.

그의 권유로 영어는 초급부터 중구일의 마을에 있는 야마테 영어학원에 다니고

수학도 참고서를 이용해서 열심히 공부했다.

술 제조는 주 1회정도 했다. 그 후는 대부분 쉬기 때문에 충분히 공부시간은

남아있었다.

그는 명대의 조선문화 연구회(조문구)에 출입하고 재일본조선인연맹(조련)의 사상을 가진 학생들과 함께 활동했다.

내가 한국계라고 알고 있기 때문에 노골적인 정치에 관한 이야기는 삼가했다.

그는 다만 조련이 하고 있는 것은 바르고 재일 한국거류민단(민단)의 사상은

가까운 장래에 쇠퇴할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했다.

나는 단기대학이건, 야간이건, 조금도 관계하지 않고 매일이 즐거웠다.

선생님의 중요한 강의는 카타카나 속기로 집에 돌아가서 노트에 신중하게 써

넣으며 복습했다.

이전의 국사관공업학교당시와 같이 뒷자리는 시끌시끌했기 때문에 제일 앞열에

앉고 잘 이해 할 수 없는 것은 집요할 정도로 질문을 반복했다.

또 갑자기 휴강인 경우 교무과에 가서 강하게 항의했다.

1950년 6월 25일 조선전쟁이 시작되었다.

할아버지 이야기는 계속 됩니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