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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막내동생 이야기.3

달빛7 2020. 2. 16.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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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학년이 되어 진학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진주에는 중학교, 사범학교가 있어 나는 사범학교의 선생님이라도 될까 라고

생각했다.

딱 그때 (1942년 12월) 경상남도에서 학교의 성적이 특히 우수한 자들에게

장학금규정이 있었다.

경상남도의 학교중에서 추천되었는데 그중에서 내가

선발된 것이다.

학교에서의 1학년부터 5학년까지의 성적을 제출하고

내가 추천 된 것이다.

나의 학교는 시골이고, 당연히 뽑히지 않을것이라 생각했지만

학교단위가 아니고 경남 전체에서 총점으로 상위 개인에게 수여되는 것으로

내가 선발되었다는 것을 교장 선생님이 알려주었다.

학교로서도 대단히 명예로운 일이었다.

수여식은 1943년 1월 16일로 정해졌다.

빛나는 수여식에는 당연히 부모님이 참가하지 않으면 안된다.

학교라던지 그 외 학교행사에 한번도 나오지 않았던 아버지를

설득하고 수상식에 참가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어머니는 열심히 아버지를 설득했지만 전혀 반응이 없어

어머니는 혼자서 고민을 하셨다.

나도 어머니의 고민하는 모습을 보고 직접 아버지에게 말해보기로 했다.

원래 나는 아버지와 웬만한 일이 없는 이상 말을 잘 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위압감에 눌렸지만 담판을 내기로 했다.

상장외에 부상도 있어 반드시 아버지가 참석하지 않으면

모처럼의 교장선생님의 호의를 헛되게 하는 것이 되어

취소 할지도 모른다 라고 말하며 반드시 참석하시도록 이야기 했다.

하지만전혀 아버지로부터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기분이 나빠 보였으므로 더 이상 부탁을 할 용기는 없었다.

어머니는 어려움 가운데에도 돈을 마련하여 나에게는 새로운 양복과

아버지 새옷을 준비하셨다.

어머니는 수여식의 2일전부터 아버지에게 반 강제적으로 참가확인을 받아냈다.

당일 아침 일찍 일어나보니 앞의 대나무숲의 잎은 하얗게 빛나고 유유히 흔들리고 있었다.

정원의 물항아리는 두꺼운 얼음이 얼어있었다.

영하 4-5도는 되었겠다.

오전 10시 학교에서는 강당에 빨간 현수막이 붙여지고 도청에서 많은 사람들과

진주 읍에서 또 교육청 관계의 분들, 학교의 학부형이 수없이 모여 수여식이

시작되었다.

시골의 학교로서는 최초의 대 행사였다.

나는 완전 새양복, 아버지도 새로운 하얀 두루마기를 입고 머리에는 갓을 쓰고

양반의 위엄을 지켰다.

도지사의 대리인이 상장을 읽기 시작했다.

반친구들과 많은 학부형이 있는 앞에서 수상하게 되어 부모님은 기쁨보다는 긴장의

연속이었음이 틀림없다.

급우들과 전교생으로 부터 축하를 받았고 이날의 일은

항상 나의 마음속에 남아있다.

그로부터 나의 진로는 급변하였다.

수상일로 부터 2일후 교장의 부름이 있었다.

교장선생님은 "너는 사범학교를 희망하고 있는 것 같지만 일본에 가서

중학교 대학교로 진학하여 장래 유망한 사람이 되어 주었으면 한다. 그것을 위한

수속은 학교에서 전부 해주겠다" 라는 이야기였다.

물론 수속은 유학을 위한 도항수속과 일본학교의 입학을 위한 수속이었다.

우리집은 가난하고 도저히 유학을 할 수 없는 상황임을 말씀드리고

사퇴의 뜻을 밝혔다.

두명의 형도 힘들게 일본에서 고학을 했지만 집에서는 한푼도 받지 못한 일을

엄마에게서 듣고 있었던 것이다.

두명의 형과 막내인 나의 환경은 당연히 다르다.

형들은 정말로 빈곤한 속에서 공부했다.

나는 가난한 중에서도 막내이기 때문에 고생하는 것 없이 자랐다.

도저히 형들과 같이 전혀 모르는 곳에서 고학하는 것은 불가능이라고 생각했다.

아직 14살의 어린아이인 것이다.

학교는 커녕 그날의 생활도 될 리가 없었다.

어머니는 교장선생님이 말한대로 두명의 형과 똑같이 일본으로 가는 것을 권했으나

나는 완강히 거절했다.

어머니는 일본에 가서 고생하지 않으면 진주의 사범학교에 보낼 정도의

여유도 없다고 강조했다.

아버지도 진학에는 절대 반대할 것이니 공부를 계속하기에는

일본으로 가는 것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나는 공부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본으로 건너가는 수 밖에 없다.

힘든 선택이었다.

나는 어머니에게 일본으로 갈 결심을 했다고 이야기 했다.

기뻐할것이라고 생각했던 엄마는 의외로 침착했다.

입으로는 엄하게해도 본심은 일본으로 보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어머니는 이대로 큰형이 있는 곳으로 보내어 형의 곁에서 있게하고 싶었던 것이다.

학교에서는 나의 일본유학을 위해 도항수속을 하고 있었다.

추천하여서 고른 학교는 도쿄의 일대일중학교였다.

입학원서는 가지고 오게 하였다.

하지만 도항의 허가는 간단하지 않았고, 4월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4월에는 학교의 신학기가 시작된다. 4월이 되면 늦어지는 것이다.

엄마는 나의 유학의지를 확인하고 고학을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큰형은 20년전에 도쿄에 유학을 했었기 때문에 지금은 그다지 아는 사람도 없다.

삼래형은 오사카에서 고학했기 때문에 오사카에는 아는 사람도 있어서 소개가 가능

하지만 나의 목적지는 도쿄이다.

어느날 어머니는 자신의 아들이 도쿄에서 고학할 것을 대비 조카인 박종기를 만나

도쿄의 하숙처와 일하고 있는 신문가게의 주소를 물어 그곳으로 편지로 연락을

하고 그 신문가게로 받아들여달라는 승낙을 받았다.

드디어 미지의 일본 유학이 결정되었다.

가는 곳은 도쿄도 시바구 타무라쵸 4쵸메 25번지 중산 신문점이다.

4월 14일 일본 도항의 허가증이 학교앞으로 도착했다.

허가일 쇼와 18년 4월 14일

부산수상경찰서 제 762호

1.도항처: 동경

2.도항목적: 수험을 위함

빨간글씨로 적혀있었고 " 입학하지 않을시에는 무효로 한다."라고

기입되어 있었다.

일본으로 도항이 결정되니 마음의 불안은 날이 갈수록 높아졌다.

첫째 위장염으로 얼굴은 퉁퉁 붓고 식사도 제대로 못할 정도로 약해져있었다.

집은 가난하고 집에서의 송금은 한푼도 없었다.

두명의 형들도 일본에서 고학했지만 당시는 나보다 2-3살 위의 나이로 도항했다.

엄마는 "형들도 고학했기 때문에 너도 안될리가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본심은 다를 것이다. 하지만 엄마의 조카 덕택에 신문사에서 조간을 배달하면서 공부할수 있는 환경은 되었다.

 그날부터 거리를 헤매는 일은 없었다.

나는 4일후 4월 18일에 출발하게 되었다.

준비라고해도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목적지에 도착할때까지의 여비만은 엄마가

마련해주셨다. 엄마는 내 여비를 마련하기위해 봄이되면 팔기 위해 땅속 깊에

저장해둔 무라든지 돈이 될만한 물건은 팔았다.

아버지는 엄마가 하는 일이 불만으로 여전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버지의 생각은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농사일에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게

속마음이었다. 원래 엄마도 막내인 나만은 진주중학교나 사범학교라도 보내서

옆에 두길 원했지만 학교장의 추천으로 일본에 보내버리게 된 것이다.

또 형들의 생각은 동생을 일본에 보내서 일류대학을 졸업시키고 장래 고향에

멋지고 훌륭하게 돌아오길 바랬다. 그 때문에 어머니를 설득한 것이다.

어머니는 시장에서 신품의 양복한벌과 속옷류를 가득 채운 가방을 사왔다.

언제나 보자기를 들고 다녔으나 멀리 떠나는 것을 생각해 가방을 구입한 것이다.

도시락은 주먹밥 몇개와 삶은 달걀 20개 정도를 준비하고 18일에 출발, 항구

근처의 여관에서 1박하고 19일 저녁에 승선할 예정이었다.

4월 중순인데도 대나무숲은 하얗게 빛나던 잎이 흔들리고 있었다.

추운 아침이었다.

이 하얀 잎을 바라보는 것도 오늘 아침을 끝이다.

같이 살던 홍래형과 형수에게 이별의 인사를 하고 아버지에게도 수줍게

부끄러워하면서 "몸 건강하세요." 라고 인사했다.

그날 아침 아버지는 쓸쓸한 표정과 상냥한 표정이 교차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일본에서 싫증나면 바로 돌아오라는 것이다.

이때 아버지의 따뜻한 말이 지금도 마음속에 깊이 새겨져있다.

생각해보면 내가 소학교 2학년때 홍역을 앓았을때 처음으로 아버지의 등에

업힌 적이 있었다. 그 외에는 안긴적도 업힌적도 전혀 기억이 없다.

아무리 학교 성적이 좋고, 성적표를 보고 어머니가 기뻐하여도

아버지에게는 전혀 반응의 기미가 없었다.

내가 밤 늦게 공부하고 있는 때는 항상 기분이 좋지 않았다.

형은 배를 젖는 것이 특기로 집 바로 앞이 도선장인 관계로 배가 돌아오는

늦은 시간 건너편 물가에서 소리치면 바로 배를 저어 건너왔기 때문에

마을사람들이 좋아하였다.

당일 아침도 물론 형이 젓는 배로 건너갔다.

1943년 4월 18일. 당분간 볼수 없게 될 남강을 형이 젓는 배를 타고

맞은편 강가로 건너기 시작했다.

나는 엄마와 저녁에 부산에 도착했다.

연락선이 출발하는 부두의 작은 여관이다. 엄마는 하루전에 부산에 도착하여

다음날 저녁 출항 할때까지 이 여관에서 도쿄까지 가는 여행객을 찾아

 그 사람에게 나를 도쿄까지 함께 동행하도록 부탁하기 위해 일찍 이 숙소에 묵었던 것이다.

여관이라고 해도 싸구려 여관같은 것이었다.

엄마는 밤 늦게까지 도쿄까지 가는 사람을 찾았지만

 대부분 후쿠오카나 오사카까지로 도쿄까지 가는 손님은 없었다.

내일 찾을 수 밖에 없었다.

당시의 부관연락선은 대개 3천톤급이 대부분이고 1942년에 새로 만들어진 것은

8천톤급의 대형 호화선이다. 3천톤급은 고려호, 덕수호, 쓰시마호, 창덕호 등등이다.

나는 쓰시마호에 탔다.

여관에서 너무 가려워서 잠에서 깨면 벽에는 새끼 손가락손톱정도의 까만 남경충(빈대)이 우글우글거리고 있다.

 남경충은 전에 본적이 있지만 저 정도로 많은 벌레에는 담력도 아무 소용이 없어져버렸다.

어머니는 남경충을 잡느라고 한숨도 자지 않고 벌레가 내가 있는 곳까지 오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다.

그렇지만 끝까지 막지 못하였고 벌레는 나의 몸에 들어왔다.

부두의 바람은 추워서 밖에서 있을 수도 없었고

 결국 어머니가 벌레로 부터 지켜준 덕분에 나는 잠을 잤지만 어머니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

다음날 저녁 승선이 시작되었다.

어머니는 많은 승객 중에서 마침 동경까지 가는 30대 젊은 청년에게 부탁을 했다.

청년은 기분좋게 어머니에게 " 동경까지 책임지고 데리고 갈테니까 안심하세요."

라고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나는 청년과 함께 동경까지 가게 되었다.

나는 남자에게 이끌려 배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마음이 굳센 어머니더라도 어린 나를 미지의 세계로 보내는 것은 어떠한 괴로움,

슬픔이었을까?

어머니의 얼굴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어머니는 몇번이나 청년에게 나를 부탁한다고 했다.

뒤를 돌아보니 어머니의 모습은 점점 작아지면서 사라져버렸다.

나는 이런 큰배는 본적이 없었다. 나룻배밖에 몰랐었다.

산같은 철강의 배가 바다위에 떠 있고 게다가 넓은 바다를 건너고 있다는 것은

상상도 할수 없었다.

청년에 이끌려 방에 들어갔다. 그리고 넓은 다다미방에 진을 쳤다.

배안은 상인풍, 학생풍, 군인이 있었다.

그들에게 점점 점령되어 결국은 짐을 두고 잘 수밖에 없는 공간뿐이었다.

나는 청년에게 짐을 부탁하고 급히 갑판에 올랐다.

배가 나갈때까지 나를 배웅하기 위해 앞쪽에 꼭 어머니가 계신게 틀림없다.

갑판에서는 커다란 굴뚝이 검은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이제 완전히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갑판에서 어머니의 모습이 뿌옇게 보였다.

하얀저고리를 입은 어머니가 나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어두워서 확실한 표정은 알 수없지만 울고 있는것 같았다.

이욱고 커다란 기적소리와 함께 배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갑판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손을 흔들고 이별을 애석해 하고 있다.

바람은 차갑고 검은 바다에 배안은 불빛이 비추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부드러운 부산의 등불은 점점 멀리 사라져버렸다.

나는 청년과 떨어져 있는 것을 깨달았다.

어머니는 그 밤 늦게 친정이 있는 밀양에 들러 다음날 돌아가신다고 말했다.

배는 새벽녁에 시모노세키에 도착. 바다위에서 아침까지 정박을 하고 8시에 접안을 했다.

 9시에 시모노세키발 오사카 경유로 동경으로 향하는 기차를 탔다.

기차를 타고 먼저 놀랐던 것은 파란산의 경치였다.

고향의 산은 민둥산으로 나무가 대부분 없다.

잠시나마 푸른 산의 자연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보고 있었다.

도중에 정차할때 마다 학교에서 들은 적이 있는 지명이 반가웠다.

오사카에 도착했을때 삼래형 생각이 났다.

역에 도착할때 마다 정해진 센베 스루메라는 도시락 판매원이 큰소리로

걸어가면서 판매하고 있었다.

까맣게 그을린 얼굴의 판매원에게 아라이역 도시락을 샀다.

처음 먹는 것으로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 일본의 풍부함을 느꼈다.

23시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려 겨우 종착역 동경에 도착했다.

아침 8시다. 하늘은 잔뜩 찌푸린 흐린 날씨였다.

역에서 내려서 바깥쪽으로 나오자 정면쪽에 이중교가 눈에 비친다.

조례때 정해진 요배( 멀리서 배례함 ) 한 그 다리 였다.

청년은 나에게 10엔을 받아 역앞 린타쿠(자전거위에 사람을 태워 보내주는 것)

가게에 건네고 나를 목적지인 타무라 마을까지 안내하도록 부탁하였다.

린타쿠 주인은 나를 데리고 큰 공원안을 거닐었다.

목적지까지 가면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공원에는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 있었다. 분수대가 물을 뿜고 있었다.

이 공원은 히비야공원이고 나중에 나의 일터가 될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약 1시간 정도 가니까 중산 신문점에 도착했다.

할아버지 이야기는 계속 됩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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