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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막내동생 이야기.4

달빛7 2020. 2. 16.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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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까야마 부부는 사전에 전보로 알고 있는 듯, 상냥하게 나를 맞이 하였다.

주인은 50세 정도로 다리가 불편한 부인과 친척의 딸 자매를 불러

가사를 돕게 하고 있었다. 18- 20세 정도로 보여진다.

신문배달의 고학생은 4명이었다.

제각기 다른 학교를 다녔다.

나는 몇일 간 선배에게 이끌려서 아침 4시반 정도에 일어나고 5시가 지나면

함께 배달을 다녔다.

배달하는 집은 거의 외우면 다음에는 혼자서 배달을 해야 했다.

신학기는 이미 벌써 시작되었다.

1년간 신전의 예비교에서 공부하고 내년 3월 2일 생으로 편입예정이라 정식

예비교에서 점심때 공부를 했다.

오후 3시정도까지는 돌아가서 석간판매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장소는 린타쿠 가게를 지나서 히비야 공원의 파출소 근처의 귀퉁이다.

그 곳에서는 기차가 다니는 유락마을의 육교가 보인다.

기차는 끊임없이 다닌다.

신문은 요미우리, 아사히, 마이니찌, 산케이 등이다.

신문의 수는 적다.

4시에 신문을 진열하면 곧 열을 맞춰 가지고 간다.

대본영(일본 통수기관)발표의 전쟁의 성과 뉴스가 전해지면 긴 줄이 생기고

가지고 있던 신문은 눈깜짝 할 사이에 다 펼려나간다.

신문 판매가 끝나고 돌아오면 싫더라도 철교위 기차가 다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그 고향에 대한 그리움....

돌아가고 싶은 기분으로 자연히 눈물이 흘렀다.

그렇지만 비단으로 장식하지 않고서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신문점에서는 학비만 전액 부담해 주고 있지만 그 외의 용돈은 일절 없다.

조식은 쌀밥이지만 적은 양에 더 먹을 수도 없다.

단 된장국만 더 먹을 수 있기 때문에 된장으로 배를 채워도 금방 배가 꺼져버린다.

신단(제단)에는 아무렇게나 찹쌀경단이 가득 놓여져있었다.

지금이라면 하나 두개 훔쳐먹었겠지만... 그때의 소년은 할 수 없었다.

아침에 1개 받아 먹었지만 이렇게 달고 맛있는 것은 지금껏 먹은 적이 없었다.

내가 먹었던 맛있었던 과자라 하면, 형이 일본에서 선물로 사온 비스켓이었다.

그 비스켓의 맛은 지금도 잊을수가 없다. 나카야마집안에 있는 젊은 두명의 딸들은

언제나 우리들 앞에서 콧노래를 부르면서 맛있는 모란병과 과자를 먹고 있다.

콧노래를 부르면서.....

"이름도 모르는 먼 섬으로 부터 흘러 들어 온 열매하나~ 고향을 떠나서...."라는

노래로 지금도 들리는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는 일본에 와서 밝은 전등밑에서 공부 할 수 있는 것은 정말로 기쁘게

생각하고 있다.

전기라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밝고 훌륭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렇지만

인간이 만지면 순식간에 죽음이라는 무서운것이라고 들었다.

어느 날 나는 방의 전등이 켜지지 않았다.

소케트가 더러워서라고 생각하고 전등을 젖은 걸레로 구석구석 잘 닦았다.

그때 감전 되어 의자에서 굴러 떨어져 버렸다.

감전했다면 죽음이라고 들었었다. 선배는 그자리에서 "감전이 되었기 때문에

한시간 이내에 죽는다" 라고 말했다.

나는 농담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긴 시간동안 두려워했다.

신문점의 나까야마 옹짱(주인을 다들 옹짱이라 불렀다.)은 경마를 좋아하고

일요일이 되면 반드시 나를 데리고 나까야마 경마장까지 갔다. 옹짱도 다소

다리가 불편하고 쌍안경등을 넣은 짐을 나에게 들게 하고 동행했다.

옹짱은 가끔 이기면 기분이 좋아 약간의 돈을 줄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지는 날이

많았다.

나는 용돈을 벌고 영화와 연극을 동시에 행하는 유락촌의 일극을 자주 보러갔다.

아주 큰 둥근형으로 된 극장이다. 연극은 희극의 에노겐과 롯파였다.

나가타니와 야마다의 연극도 가끔 있었지만 그것에는 전혀 흥미가 없었다.

매점에는 달걀 덮밥과 닭고기 덮밥이 장식 되어 있고, 한번도 먹은 적이 없기 때문에

공복일때 용돈을 받았을때 먹고 싶었지만 반드시 식권이 필요하다.

주식은 완전 통제의 시대이고 식권이 없기 때문에 먹을수 없다.

식권은 쌀의 배급을 받는 대신에 외식자용으로 배급하는 것이다.

어느 날 내가 동경에 와 있다는 것을 알고 유리카씨 딸 둘이 방문했다.

나는 형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을 숨기지 않고 솔직히 말했다.

부모님은 위독하지 않고 고향에서 결혼을 시켰기 때문에 거짓 전보로 불러 들인것.

부모에게는 절대로 반항하지 않는 그 때 형의 괴로운 입장등을 이야기 하고

이제 이곳으로는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유리카씨는 그것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

나를 불러내어 식당으로 데리고 갔다. 언제나 밖에서 보고 있던 그 식당이다.

식당에 들어가자 무엇을 먹을지 물어서 식권이 없어서 안된다고 설명하자

식권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언제나 바라만 봤던 튀김덮밥을 주문했다.

주인은 주문했던 튀김덮밥을 가지고 왔다.

튀김덮밥이라는 것을 유리카씨 덕분에 처음으로 먹을 수 있었고,

이 맛은 잊을 수가 없다.

돌아갈때 유리카씨는 무리하게 나의 주머니에 백엔이라는 큰 돈을 넣어주었다.

가까운 시일내 반드시 오사카에 오라고 말하고 떠나가 버렸다.

나는 1943년 9월에 편입하고 동경공학교에 입학 할 수 있었다.

동경 공학교는 그다지 유명하지 않았지만 도중에 입학 할 수 있었다.

1944년 4월 2학년으로 진급하자 특기생으로서 학비는 면제되었다.

특기생은 급장, 부급장 두명이지만 또 다른 한명은 인도에서 유학온 학생이고

늘 나의 라이벌이었다.

1944년 여름도 지나가던 어느 날 하평리라는 나의 고향 이웃마을에서 왔다는

30세정도의 전옥산이라는 사람이 나를 찾아왔다.

어머니 일가와 친한 동료사이로 그가 일하고 있는 공장이라도 데리고 보살펴 주라는 편지가 와 있었다.

이미 어머니에게는 아무일도 없고 걱정은 필요없다고 전했고.

한편 식사의 부족한 불만은 편지로 알려드렸다.

나는 지금 일도 즐겁고 학교도 다닐 수 있어서 기쁘지만 무엇보다도 용돈도 없어

배고품을 참을수 없어서 그에게 호소 했다. 그는 3년 전에 이곳에 와서 동포가

경영하는 마을 공장 책임자를 하고 있었다. 식사는 전혀 걱정없고 용돈도 충분히

벌고 야학에 다니는 다른사람보다 일찍 일을 끝내고 통학할수 있도록

배려해 준다고 한다. 나는 빠른 시일내에 가보기로 했다.

나는 그로 몇일 후 그 공장을 방문했다. 처음 공장내를 엿보고 깜짝 놀랐다.

작은 탁상선반을 취급하는 공장이었지만 공장직원의 하얀 작업복은 기름이

스며든 검정색이었다. 선반에서 떨어진 기름을 뒤집어 쓴 공원들은 얼굴까지

기름이 묻어 있었다. 소형선반에서 벤칠렛이라는 군용기에 사용하는 특수한

부품을 가공하고 있었다. 매우 정밀한 공정이 요구되었다.

100분의 1미리를 틀리더라도 불합격품으로 된다.

옥산씨는 움직이는 이 정밀한 부품을 자르는 바이토를 다루는 공장장이다.

말할때는 한마디 한마디 매우 신경써서 말하는 바른 생활 청년이고

공장주인이 가장 신뢰하는 공장장이다.

점심을 함께 했다. 너무 시끄러웠다. 흰쌀밥은 더 먹을 수있고 생선구이나

고기 김치등도 보는 것만이 아니라 정말 많이 먹을 수 있었다.

나는 여기서 일하고 싶지만 먼저 학교의 문제를 해결해야했다.

점심시간의 학교에서 야학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된다.

몇일 후 다시 오기로 하고 돌아왔다. 돌아와서 선배에게 학교일을 의논했다.

야학에서 구사관공업학교가 있기 때문에 지금의 학교에서 바꾸게 되면

좋을꺼 같다고 했다.

성적표를 가지고 구사관공업학교를 방문하다면 입학이 가능할 것인가?

나는 현제 수업료도 면제받고 있는데 학교를 바꾸게 되면...

가장 괴로운 배고픔에서 해방되는 것고 월급까지 벌수 있기 때문에

몇일 수 다시 옥산씨가 있는 오카무라 제작소를 방문해 공장원이 되고

싶다고 했다. 주인 오카무라씨는 경북달성군에서 형제가 와있고

각자 별도의 공장을 경영하고 있었다.

둘은 함께 학문은 없지만 훌륭한 사람이라 느껴졌다. 일하고 있는

약 20명은 대부분 밀항해온 조선 출신자였다.

10월에 나까야마 신문점을 떠나 시부야에서 오카무라 제작소로 옮기게 되었다.

나는 오카무라 형제가 경영하는 곳중 동생의 공장에서 근무하였다.

입사와 동시에 처음부터 끝까지 옥산씨의 지도를 받았다.

옥산씨는 대부분 중요한 기계의 바이트를 닦고 장치하는 기능공이다.

또 완성품의 검사관이기도 했다.

제품의 10퍼센트는 불합격품이었다. 그정도로 정밀함이 요구되었다.

나에게는 늘 동생처럼 세세하게 도움을 주었다.

저녁 5시라도 넉넉하게 4시에 일을 끝마쳐 학교에 보내주었다.

학교는 마루에이 신사가까이 풀줄기의 표피와 일본 나막신으로 유명한

국사관공업학교였다.

겨울 아침의 추위는 혹독했다. 모터는 따뜻해지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기

때문에 폐유를 태워 공장내를 따뜻하게 했다.

검은 연기의 매연으로 공장직원의 얼굴은 새까맣게 되었다.

공장에는 20명 정도 있지만 나의 입사 후 부터는 김천에서 밀항했다는

나보다 4살 위의 한사람이 있다. 그와는 그후 오래 만나왔다.

그는 종전후 한국으로 돌아가 내가 요코하마에 있을때 다시 기자의 위조

여권으로 밀항, 요코하마의 수많은 화제를 남기고 향년 74세에 이 생을 떠났다.

공장주인 오카무라씨는 42살이다. 무엇보다 술을 좋아하고 아침부터 벌건 얼굴을

하고 때때로 공장을 나왔다. 조리있는 말솜씨도 아니고 많이 배우지 않았지만

성격은 자상하여 공원들로 부터 존경을 받고있었다.

국사관공업학교는 2부제이다. 야간학생은 낮시간에 일하고 와서 피곤하지만

향학심은 주간생보다 불타고 진지하게 수업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제대로 강의도 듣지않고 뒷자리 모여 소란스러웠다. 앞자리가 없으면 강의도

들을 수 없다. 나는 언제나 가장 앞열에 자리를 잡고 하나하나 선생님의 강의를

듣고 받아쓰고 기숙사에 돌아와 복습했다.

전쟁은 매일 긴박도를 증가시키고 공습경보와 등화관제로 전등을 끄는 날이

많았다.

학교도 도중에 학생들을 돌려보내기도 했다. 또 방공호에 들어오는 시간도 많아셔

공장작업도 점점 소홀해져가게 됐다.

가끔씩 공장 가까이에 폭탄이 떨어져 지진과 같은 떨림과 소리가 났다.

지면은 격하게 흔들리고 방공호의 천장은 흙이 떨어져내린다.

1945년에 들어가자 점점 전쟁현황은 일본이 불리한것 같이 뉴스에서 보도됐다.

미군이 오키나와에 상륙했다고 한다. 오카무라씨는 공장을 지방으로 소개시키고

피난처를 물색하고 있었다.

3월10일 쯤 동쪽하늘은 한낮같이 밝고 B29의 편대는 굉음을 울리며 저공비행

하면서 소이탄을 떨어뜨렸다.

아사쿠사, 후카가와 일대에 바깥쪽 부터 순차적으로 폭격했기 때문에

불바다가 되어 누구도 도망갈 수 없었다.

그날은 바람도 불고 있었다.

다음날 조사에 의하면 강에 떨어진 사람 수천명이 죽었다고 한다.

뉴스에서 불에 타 죽은 사람은 10만명 정도 일것이라고 했다. 잠시도 기다릴 수가 없었다.

 곧 소개(피난)되어 졌다. 소개처는 치바현 이와이 마찌의 농가의 창고이다.

학교는 등화관제때문에 당분간 휴교이다.

나는 공장장과 함께 소개처에 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4월 중순 공장은 재개했다.

오카무라 형제의 형은 수해도에서 재개했다.

공장이라 하더라도 시골 창고를 개조한것에 불과했다.

오월의 어느날 하늘은 새파랗게 맑았다.

갑자기 하늘에서 폭음이 들려왔다. 더구나 이중주이다.

놀라서 하늘을 올려다보니 오천미터정도의 상공에 B29의 한대가 돌고

일본의 구식 전투기 한대가 B29의 기체에 부딪치려는듯 쫒아가고 있었다.

그 사이 전투기는 빨간불을 뿜으며 지상으로 추락했다.

이윽고 B29도 굉음과 함께 수개의 조각으로 파열하고 불을 뿜으면서 추락했다.

우리들은 모두 서둘러서 추락지점으로 향해 달려갔다.

이와이의 중심에서 1키로 정도 떨어진 해변 타무라이다. 커다란 차바퀴는

땅 깊은 곳까지 박혀있고 동채는 불타고 벨트를 한채 병사 둘이 검게 타 있었다.

둘은 조종사였다.

곧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중년의 어느 사람이 그 까맣게 타죽은 병사를 봉으로 때렸다.

전쟁은 비참하고 잔혹했다.

사람은 선악의 이성까지 잃어버렸다.

곧 도착한 헌병에 의해 우리들은 그 장소로 부터 내쫒겼다.

대도시는 대부분 폭격을 받아 특공대의 비참한 뉴스도 라디오에서 알수 있었다.

8월에 들어서자 신형원자폭탄이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떨어졌다.

할아버지 이야기는 계속 됩니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