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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막내동생 이야기.2

달빛7 2020. 2. 16.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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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태어난 마을은 진주읍내에서 6키로 정도 떨어진

통칭 큰들이라고 하는 비옥한 논과 밭 그리고 과수원이 많은

작은 마을이다.

동쪽은 상평리, 서쪽은 하평리로 양쪽 다 합쳐도 80세대정도의

마을로 앞에는 남강이 흐르고 뒷쪽은 옆동네까지 약 2키로의 모래

벌판으로 되어 있다.

비가 내리면 모래벌판은 강이 된다. 마을의 앞은 대나무 숲이

무성하고 대나무숲의 중간정도에 좁은 길이 있지만 대낮에도

어둡고 기분이 좋지 않아 어린이들은 지나가기를 꺼려했다.

대나무숲의 바로 앞은 강이 온화하게 흐르고 있었지만

이 온화한 흐름도 일단 큰비가 내리면 심하게 범람하여 상류에서 부터

집과 가출을 떠내려보냈다.

강의 맞은편에 한쪽 일부가 잘려진 산이 있어 그 절벽면에는 수심이

깊었다. 강 밑쪽까지 수십미터나 될것이라고 생각 될 정도의 깊이를

가지고 있었다.

마을의 뒷쪽 2키로는 모래 벌판으로 되어 있어 비가 많이 오면 강이 되어

마을에 물이 넘쳐 들어와서 강의 섬이 되어 버린다.

몇년에 한번 침수 하면 집과 가축은 떠내려가기 때문에 도망칠 곳은

대나무숲 뿐이다.

나는 어릴적 한번 이 무서운 광경을 목격한 적이 있다.

그때는 마을 사람 10명이 탁류에 휩쓸리는 비참한 사태가 발생했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약 4키로 정도로 그중 2키로는 사막과 같은 모래벌판으로

겨울에는 바람으로 모래연기가 되어 전방을 막고,

여름은 뜨거워진 모래위를 걸을수가 없어서 멀리 돌아서 포플러 가로수길을 건너면

시간이 배로 걸렸다.

수업중 갑자기 강한 비가 내리면 모래벌판이 침수해서 집에 돌아갈수 없기 때문에

교직원이 교대로 침수릐 감시를 하고 침수 되기 시작하면 수업을 그만두고 서둘러

귀가하게 했다.

2키로의 모래길의 통학은 어린이에게는 정말로 가혹했다.

모래지대가 아닌 곳은 토질이 좋고 밭에 나는 야채류는 유명했다.

특히 무는 큰들 무라고 해서 크고 맛은 전국 제일이었다.

또 사막지대이기 때문에 남경두(南京豆)는 상질로 풍부하게 얻을 수 있었다.

겨울의 아침은 앞의 대나무숲의 잎이 하얗게 반짝거릴때는 북풍이 불어 추운 날로

방안의 세면기의 물도 얼어버린다.

방은 온돌이지만 땔감이 없어서 몇시간은 따뜻하지만 한밤중이 되면 얼음방으로

변한다.

또 대다무숲의 잎이 파랗고 조용한 아침은 남서의 바람이 불어 따뜻한 날로 항상

삼한사온이 반복되어졌다.

항상 지나는 모래길에서 서쪽으로 약 2키로 정도 떨어진 곳에 약간 높은 언덕이

있어 그곳에는 항시 10 - 12명정도의 나병환자가 모여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바가지를 들고 먹을 것을 받으러 온다.

하루종일 호박이나 무밖에 먹을 수 없는 봄에도 이 나병환자들에게는 거절하지않고

음식을 나눠주었다. 거기에도 이유가 있다.

이들에게 음식을 주지 않으면 매일 귀가하는 아동들을 괴롭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나병환자들이 아이의 생간을 먹으면 병이 나을수 있다는 것으로 이전에는

아이들이 희생되기도 했다.

매일 통학하고 있는 아이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게 하기 위해

자신은 식사를 걸러서라도 그들에게 나눠줬던 것이다.

귀가시에는 가능한한 친구들과 함게 하교하도록 학교에서 지도 하고 있지만 각각

학급에 따라 마치는 시간이 다르고 동급생이라도 청소당번등으로 하교가 달라져

늦게 혼자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옆집에 살고 있는 동급생 박일달은 반드시 도중에 나의 하교를 기다려주어 무서운

모래벌판을 함께 해 주었다.

하교길 몇번인가 그들에게 쫒긴적이 있어서 엄마는 밥을 그들에게 나눠줄때

아이들을 쫒는 일은 삼가해달라고 항상 부탁했다.

내가 소학교에 입학 한것은 1937년 , 지나사변이 시작된 해로 소학교에

입학하는 것은 일단 간단한 면접시험이 있어서, 입학희망자의 연령도 모두 제각각 달랐다.

 내가 8살로 가장 나이가 적으편으로 10살위의 아이도 면접에 왔다.

나는 어머니의 권유로 면접시험장으로 향했다.

시험은 간단한 편으로 연령과 가족사항을 묻고 동물의 그림을 보여주며 동물의

이름을 묻기도 하였다. 바로 위의 승래형이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것을 알아

"입학하면 형과 같이 노력하거라."라고 격려 받고 입학이 결정되어졌다.

1학년때는 조선어 일본어를 가르쳐줬으나 2학년이 되자 일본어 뿐이었다.

물론 일본 학교와 같이 일본문부성발행의 교과서이다.

3학년이 되면 겨울이라도 반바지를 입고 등교시켰다.

 또 추운 겨울날에도 교정을 뛰게 하는 등 어린이에게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엄격한 훈련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상급생과 부모들로부터 불평을 들어도 현재군인들이 타국에서 엄격한 군무로 복무하고 있으므로

 모두를 훈련시켜 강한 일본국민으로 키우고자하는 교육방침의 설명

뿐이었다.

재학중은 결코 모국어인 조선어를 사용해서는 안된다라는 엄명이 당국에서 있어서

일본어외에는 사용할 수 없었다. 여기에 위반을 하면 복도에 바가지가득 물을 담아

수업종료까지 머리에 얹고 서 있게 하였다.

이 벌칙은 졸업을 할때까지 계속되었다.

일과로서 매일 황거(일본천황이 거주하는 곳)을 향해 궁성요배, 교육칙어의 암기

신사참배등을 의무적으로 강요당했다. 조선은 완전히 일본으로 취급받아

내선일체의 시대로 옮겨가고 있었다.

학교에는 일본에서 온 이와오 선생님과 나카나리 선생님이 부임하셨다.

두분다 20살 전후였다. 수업을 하는 곁에는 교육내용 전반에 대해 감독하고

있었다.

1937년 대동아전쟁이 시작하자 시시각각 전쟁의 성과가 있다 빠른시일내에

일본이 승리할것이라고 믿었다.

이와오 선생님은 젊었지만 굉장히 상냥하여 학생들로 부터 호의를 받았다.

매주2회 수업시간에 교정의 구석에 모여 미야모토 무사시의 책을 읽어

들려주셨다.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다.

나의 반에는 남녀합해서 40명이다. 이와오선생님은 2년후 소집영장을 받아

학교를떠나게 되었다.

내가 4학년때의 일이다.

우리들은 호의를 가지고 있던 선생님과의 이별을 슬퍼하며 무운장수를 빌었다.

매주 즐거웠던 미야모토 무사시의 책도 도중에 끝나고 최후까지 들을수 없었다.

나는 1학년 입학이래 공부만은 절대로 남에게 지지 않는다 라는 강한 신념으로

밤 늦게까지 집중하여 공부하였기 때문에 1학년부터 6학년까지 급장을

할수 있었다.

새로운 교과서를 받으면 철저히 예습을 하여 학교에 갔을때는 이미 복습을 하는

정도였다. 4학년때까지는 형에게 모르는것이 있으면 물어보거나 해서 외웠으나

5학년이 되자 형도 없어지고 어떻게든 참고서가 없으면 공부가 다음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부탁해서 참고서를 사고 싶지만 어려운 집안형편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좀처럼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어느 날 생각한 끝에 어머니에게 참고서가 필요하다고 숨김없이 말했다.

그때 어머니는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몇일 후 읍내에 가서 참고서를 사라며 참고서 값을 받고 나는 매우 기뻐하며

읍내의 책방에서 구입하였다.

마음에서 진심으로 어머니에게 감사했다. 나는 다음날부터 밤늦게까지 공부하는

재미가 늘어났다. 남이 모르는 것을 먼저 알아둔다.

하지만 거기에는 즐거움만이 있지 않았다. 어린이였던 나는 의외의 것에는 생각이 미치지 않았다.

학문을 처음부터 중요시 하지 않던 아버지는 내가 밤 늦게까지 공부하는 것에 반대

하셨다. 새벽에 일어나 밭일을 하고 밤에는 일찍 쉬고 싶은데 불을 켜고 언제까지나

공부하는 나에게 매우 불만이었던 것이다. 공부중인 밤9시경엔 초롱불을 꺼버리는

것이었다. 어머니도 거역하지 못하고 빨리 자도록 노력했다.

나는 불만이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 효도를 하는 것이 나의 꿈이었는데....

아버지가 빨리 쉬고 싶어하는 기분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아침일찍부터 밤까지

일하고 푹 쉬고 싶은데 언제까지나 불을 켜고 있으니깐 당연히 불만인것이다.

또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시골에서 별다른 오락도 없던 아버지가 때때로

아이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부부의 사랑의 속삭임까지 내가 빼앗아 버린것을

나는 이제서야 반성하고 후회한다.

나는 어린시절 몸이 약했다. 어머니는 어려운 가계에서도 한약을 사서 마시게 해주었다.

봄이 되면 쌀도 없어지고 호박과 무밥을 먹었다.

여름에는 보리가 수확되었기 때문에 보리밥은 풍부하게 먹었다.

내가 5학년일때 갑자기 야맹증에 걸려 불이 켜져있어도 떨어진 곳은

잘 볼 수없었다. 하지만 초롱불밑에서 공부하는 것에는 지장이 없다고 느꼈다.

매일밤 어머니는 깜깜한 어둠의 대나무숲에 데려가셔서 커다란 가위를 쳐서

소리를 내며 아들의 눈이 보이도록 빌었다.

뭐니뭐니해도 가장 중요한 영양이 되는 물고기, 육고기, 두부류는 일체 싫어하며

단지 명란젓과 맛을 낸 양념등으로 밥을 먹고 식사를 하지 않을때에는 간장에

참기름을 부어 비벼먹었기때문에 위염에 걸려 얼굴만 통통하게 부어 완전히 영양실조에 의한 야맹증이었다.

 고가의 한약도 영양실조에는 전혀 효과가 없었다.

다른 과목은 전부 갑(甲) 이었지만 몸이 약했던 탓으로 체육만은 언제나 을(乙)의

성적이었다.

6학년에 올라가자 전쟁도 격심해지고 학교에서는 모형비행기 대회가 성행하였다.

나는 어머니에게 돈을 졸라 시장까지 모형비행기의 재료를 사러갔다.

몇번인가 날려보았지만 생각만큼 잘 되지는 않았다.

몇일 후 대회를 앞두고 있었다. 이 시합에는 절대로 이기고 싶었다.

어떻게든 시합일까지 오래 나는 비행기를 만들어 1위가 되고 싶었다.

문제는 가벼운 프로펠라를 오래 날게하는 고무의 질이라고 생각하여

여러가지 고무를 찾아 붙여보았지만 생각한것 만큼 오래날지는 못했다.

어느 날 길에서 신형 고급의 재료를 구했다. 고무만 좋으면 정말로 오랜 시간 날 수 있다.

 어머니에게 부탁하여 속옷에서 뽑아낸 멋진 고무를 손에 넣었다.

나는 모형비행기를 만들어 정원의 자리위에 놓고 말렸다.

그날의 일이다.

우리집에서는 목화를 재배하였다. 그날도 많은 목화를 정원의 커다란 자리위에

펼쳐서 건조시키고 있었다. 원래 목화를 재배하면 그 반은 나라에 공출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공출하면 싼 가격밖에 받지 못하기 때문에 조금만 공출하고

남은목화는 베틀로 짜서 옷감으로 만들어 팔고 있다.

거의 어머니의 일로 밤늦게까지 베틀로 옷감을 짜느라 고생을 하고 있었다.

그날 갑자기 읍내에서 트럭을 타고 조사관이 목화의 적발을 위해 마을을 급습했다.

갑작스런 급습에 아버지는 정리할 틈도 없이 말려진 목화위에 다른 자리를 덮어

감추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나는 방금 만든 모형비행기를 그 자리 위에다 놓고

말렸던 것이다.

몇 분후 6-7명의 사람이 방으로 갑자기 올라오고 집안을 조사했다.

목화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돌아가나 싶더니 이 모형비행기를 들어올려 몹시도

나를 불안하게 하더니...

곧 그 밑의 부풀어오른 자리를 들추어보고 숨겨놓았던

목화를 발견하고 전부 압수 한것이다.

압수당한 뒤 나의 울고 있는 모습을 보고

아버지는 혼낼 기력도 없이 그저 멍하게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모형비행기 대회당일 내가 만든 비행기는 하늘 높이 멀리 날아올라

1등상을 따게 되었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