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어보기

할아버지 막내동생 이야기.

달빛7 2020. 2. 16.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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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도 중요하지만,

저는 저의 주변 분들이 제 인생의 가장 중요한 분들이고,

그 분들의 이야기 듣기를 참 좋아합니다.

어려서 부터

늘.... 할아버지 할머니께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곤 했습니다.

오늘부터는

넘넘 존경했던 울 할아버지와 손공자수 스승님 율당할아버지의 동생이신

조 충래 할아버지께서 적어주신 이야기가 있어서

그 이야기를 다시 찾아서 적어보고 기억해보려 합니다.

여러 할아버지들의 이야기들을 알고 있지만,

특히 우리 조충래 할아버지는 일본에서 큰 거부가 되시어

집안의 기둥이 되신분이시고,

어린시절 저의 영웅이셨기 때문입니다.

봉준호 감독님 인터뷰처럼,

마틴스콜세이지 감독님처럼,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가 가장 창의적인 이야기다를 완전 동감합니다.

누구의 머리속 상상이 아닌,

생생하고도 유일한 사실들이니까요.

그래서 어떤 소설보다도

감동적으로 다가옵니다.








조 충래 할아버지 이야기.

나는 1929년 2월 17일 아버지 조차제, 어머니 박덕임의 5남으로써

진주의 시골에서 태어났다.

진주 읍내에서 약 6키로 정도 떨어진 상평리라고 하는 곳이다.

아버지는 선조로부터 29대 나는 30대이다.

초대는 신라의 대장군 원윤공이고 2대는 중랑장, 3대는 장군 원이,

4대는 오위도영장으로 이어진다.

어머니 박덕임은 양반의 가계를 타고 났다. 어머니는 밀양 박기진의

5형제의 차녀로 태어났다. 논밭과 살림도 많아 외조부는 마을의 면장을

맡고 있었다.

당시로서는 드문일이었지만 어머니는 일찍부터 마을의 서당에서 한자를

습득했다. 성격도 좋고 밝아서 마을의 남자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10살이 지났을 무렵부터 곳곳에서 며느리로 삼고 싶다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15살때 양반가계인 아버지와 결혼을 하였다.

아버지는 본관인 함안에서 8남1년의 차남이셨다.

형제의 대부분은 마을의 서당에서 학문도 배웠지만, 어버지 차제만은 차남으로

소작인, 사용인의 감독도 하지 않으면 안되고 서당에도 가지 못하고 어려서부터

농업에만 전념하게 했다.

어머니는 양반의 아들이 무학이라고는 꿈에도 모르고 중매인에게서 들은 그대로

만나보니 미남자라 호감을 갖고 그대로 부모의 말대로 결혼을 승낙했다고 한다.

결혼 피로연은 마을 사람들로 부터 축복을 받았으며 모두가 선망하는 것이었다.

결혼 후 어머니는 아버지의 문맹을 알고 쇼크로 한동안 굉장히 고민을 했었다.

아버지는 충실히 농업에 종사하고 공헌도를 인정받아 분가할때 형제중에서도

특별히 많은 논밭을 상속받았다. 형제중에서도 선은 대단히 머리가 좋고

학자타입으로써 마을에서는 꼭 필요한 존재여서

출생하는 아이들의 창명이라든지 결혼의 주례와 대리수속등 온갖 어렵고

귀찮은 것을 해결하면서 평범한 삶을 살고 있었지만, 언젠가 부자가 되어

머슴을 두고 유복한 생활을 보내고 싶다라고 야망만은 보통사람 이상이었다.

어느 날 온화한 성품의 아버지는 동생에게 문맹인것을 이용당해 어머니에게는

비밀로 무리하게 보증인이 되었다. 유복한 아버지에게 대한 질투도 있었을 것이다.

도박을 위한 보증이었던 것이다.

문맹이었기때문에 도장을 찍고 남동생에게 속아 논과 밭을 전부 잃어버린 억울함은

물론 타인보다 많은 논밭을 가져서 마을 사람들로부터 부러움을 받으며 생활하고 있던 두분은

밤에 길을 헤맬 정도로 몰락해버렸다.

겨우 집만 남겨졌지만 실망과 낙담으로 매일 술에 취해있던 아버지를 마음이 굳센

어머니가 설득하고 집을 처분해 약간의 돈과 본가로 부터 원조금을 받아 아무도

모르는 진주의 시골로 이사하게 된 것이다.

조금의 농지와 소작에 의해 겨우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을때는 두명의 아이도

꽤 성장해있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문맹때문에 속은 것을 알고 그 후로 부터는 아무리 빈곤해도

아이들에게는 반드시 학문을 익히게 해야겠다고 결심한 것이 그때이다.

어머니는 5년에 한번씩 5명의 아이들을 낳았다.

길래, 홍래, 삼래,승래, 충래이다.

당시 부모님은 길래, 홍래 두명의 아이들을 안고 진주로 이사와서

약간의 논과 밭에서 농사일을 했지만 기아로 전혀 수확이 없는 해도 있어서 먹는것 조차도

부족한 형편으로 아이의 교육등을 도저히 생각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

어머니는 생활이 아무리 어려워도 학문을 배우게 하겠다라는 신념으로

 장남 길래를 서당에 보내고 그 후 보통학교를 보냈다.

아버지는 대단히 반대하여 그일로 때때로 충돌했다. 하지만 차남인 홍래만은

아버지의 맹렬한 반대로 서당에도 가지 못하고 어렸을때부터

농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아버지 혼자서 아침일찍부터 늦게까지 농사일에 전념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그만 아버지가 말한데로 할 수 밖에 없었다. 이일로 홍래형과 엄마와의 사이에서

말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길래형이 보통학교를 졸업하자 15살의 소년을 엄마는 무리하게 일본에서

고학하게 했다.

길래형은 동경에 가서 신문배달과 공장잡일을 해나가면서 우에노의

암창철도학교에서 배우고 졸업하고 바로 만철(구 만주철도)에 입사, 차장에서 역장이 되었다. 

 길고 긴 혹한의 만철 생활에서 일본의 종전으로 귀향했다.

북한의 나진의 역장을 최후로 진주에서 초등학교 교장을 하면서

5남 2녀를 기르고 남자 4명중 3명을 어렵게 박사로 키워냈다.

5명중 장남은 일찍 병으로 죽고 차남은 뉴질랜드로 가서 35살에 이공학 박사가 되고

나중에는 캐나다 정부의 요청으로 캐나다 사회보건청의 공직으로 일했다.

넷째아들은 농학박사로 농대의 교수가 되고 셋째아들은 마산에서 고교 교사,

다섯째 아들은 부산에서 의학박사가 되었다.

형의 보수로는 네명을 최고 학부까지 보내는 것은 도저히 무리였지만

 4명다 성적도 뛰어났고 그 중 3명은 장학금으로 국립, 사립대학을 진학 할수 있었다.

내가 어렸을때 형이 만철의 역장을 하고 있을때이다.

금단자의 모자를 쓰고 상의의 양소매가 두줄로 금단자인 옷을 입고 돌아왔을때는

마을 사람들이 모두모여 환영을 했다.

어머니는 아들의 출세한 모습을 매우 자랑스러워했고,

 마을사람들도 굉장한 대접을 해주어 아직도 그일을 확실히 기억하고있다.

그날 밤 나는 앞으로의 진로에 관한

이야기로 서로 의논을 하였다.

형은 대정시대의 극도의 빈곤과 차별속에서 고생한것을 생각해 동생인 나까지

고학시킬수는 없다면서, 나의 성적표를 보며 진주중학교 졸업후, 본인의 희망대로

상급학교에 보내는 쪽이 좋겠다고 했다.

길래형은 일본 종전 후 고향으로 돌아와 학교 교장을 하면서

항상 마을사람들의 여러가지 상담 상대가 되었기 때문에 모두로 부터 존경을 받았다.

길래형과 형수는 보통학교시절의 동급생으로 어려서부터 결혼을 약속하고 있었던

모양으로 일본에서 귀향하자마자 바로 결혼을 했다.

만철에 입사하고 나서 평소 부모님을 돌볼 수 없었던 것이 매우 마음에 걸렸던

모양으로 몇번인가 부모님을 북한과 구 만주에 초대해서 여행을 보내드렸다.

길래형은 결혼 이후 형수와의 사이에서 생애 한번도 큰소리를 내어 싸우는 일이

없었고 항상 언제나 서로 경어를 사용하였다.

정말 보기드문 부부였다.

당시 나는 부부의 경어 사용에 의문을 품을 정도였다.

두분은 생이 끝날때까지 가난했지만 원만하고 평온한 가정환경아래에서

모범적인 7명의 아이들을 교육시켰다.

길래형은 85살까지 한번도 병원문을 넘은 적이 없었고, 어느 날 자택에서

자는 듯 이 세상을 떠났다.

그로 부터 1년후 86살의 형수도 아침 나오지않아 방문을 열어보니

멀리 떠난 남편의 곁으로 여행을 떠나고 빈 몸만 쓸쓸히 남겨져 있었다.

남편을 먼저 보내고 뒤를 정리하고, 부인이 한발짝 늦게 뒤를 쫒아가는 정말

행복한 부부였다.

할아버지 이야기는 계속 됩니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