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좋은 친구를 만났다.
케빈이라고 미국서 살던 아파트에서 일하시는 분인데
엔지니어 출신으로 무슨일이든 쉽게 해결하시고
마음도 넘 따뜻하셔서 좋은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우리 부모님들이 미국으로 다니러 오셨고...
케빈이랑 인사를 하게 되었다.
울 엄마는 웃는 얼굴로 반갑게 인사를 하셨고....
울 아부지는 역시 아니나 다를까 경상도 남자의 전형적인 과묵함을
보이시면서 케빈이 오해 하게 만드셨다. ㅎㅎㅎ
그리고 나에게 케빈이 물어본다.
아버지가 왜 말씀이 없으신지....
그래서 음.........
한국 특히 경상도 좀 나이드신 아버지들은 하루 딱 세마디 하신다고
알려줬다.
아는? 밥묵자. 자자.
우리 아버지랑은 하루에 한마디도 이야기를 나누지 않을 때도 많았었다고
이야기 하자....
케빈은 입이 딱 벌어지면서....
너무나 놀라고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고 했다.
어떻게 아들, 딸에게 따뜻한 사랑을 나눠주지 않느냐면서
도저히 이해 할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그래도
국민학교 4학년때 아빠랑 손잡고 사형도수라는 성룡 나오는 영화
단 둘이 봤던 좋은 기억이 있다고 했더니.....
케빈이 자기딸은 그런 추억이 톤(ton)이 넘게 있다고 한다.
우리 말로 수천번도 더 있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나는 우리는 말을 하지 않아도 마음으로 서로 느낀다고 이야기를 하니
Intimacy 인티머시 즉 친밀감을 이야기하며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당연히 대화를 해야하고 서로 따뜻하게 안아줘야되고
그러지 않냐면서 강변을 했다.
그래서 음.....
문화적 차이라고 설명하면서
처음 미국에서 미국친구들이랑 허그 하고 비쥬하는게 제일 어색했다고
지금도 어색하다고 이야기를 해줬다.
그래도 절대로, 절대로 이해 못한다고...
심지어 강아지를 사랑하는 마음에 강아지 머리도 쓰다듬는데....
어찌 사랑하는 딸 아들을 안아주지 않고 이야기도 하지 않냐면서
흥분을 했다.
우리아버지 좋은사람이라고 그냥 그러고 말았는데.....ㅎㅎㅎㅎ
우리 아버지를 가만 생각을 해봤다.
우리 아버지.....
앞글 큰집 마루 유리창을 깨다. 에 살짝 아버지 집안 배경을 적었다.
고려시대 이조년 할아버지의 32대 손으로
조선시대에도 조상님들이 사헌부 사감원등 주로 감찰 일을 하실정도로
곧이곧대로 하시는 정직한 가풍과 가훈이 내려오고 있다.
조상님들의 효심, 충심 이런 이야기들을 자랑스러이 여기시고 본받으려 하시고
집안 행사를 제 1순위로 생각하시고 잘지키고 계신다.
그리고 세상에서 제일 존경하는 분이 큰형님이시다.
형님 말씀이면 옳고 그르고 따지지 않고 무조건 따르신다.
그래서 다른 형제들 그리고 조카들의 오해도 사긴 하지만.... 나는 잘 알고 있다 우리 아버지를....
그리고 나의 인생을 역추적 하거나... 나의 느낌으로 보면
전생에도 무슨 강한 인연이 있었는지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결정에는 아버지가 항상 계셨고.....
어린시절에도 시골에 있다가 부산 집에 들어서서 안방에 앉아계시는 아버지 얼굴만 봐도
반가워서 눈물이 나곤 했다.
왜 그런지는 정말 모른다.
하지만.....
그런 강직하고 정직한 성품으로는 이세상에서 잘먹고 잘 살아가는 것은 정말 힘이 든다.
즉....돈과 인연이 없으신 분이시다. 아니 돈을 피해 다니시는 분이시다.
아버지의 고향은 경상남도 산청이다.
고려시대 공신들이었던 성주이씨 할아버지들은
조선시대가 되어 전주이씨들에게 절대 충성을 할수 없었고...
전주이씨들은 말을 듣지 않는 고려 귀족 성주 이씨 할아버지들을 엄청 박해했고
박해를 엄청 받던 성주이씨 우리 할아버지들은
전주 이씨들에 의해 거의 몰살을 당할뻔 하셨다.
몽둥이로 때려 죽이고 귀향을 보내고.... 하여
지금 산청 그리고 남해 등지로 하향하셔서 정착하시고 지금껏 살아오셨다.
그게 끝이 아니라 일제시대에는 우리 친할아버지는 일본에 징용으로 끌려가셨다.
징용가신 할아버지를 따라 할머니가 일본으로 건너 가셨고....
할아버지는 막장에서 일을 하시고
우리 아버지는 일본에서 세째아들로 태어나셔서 일본에서 초등학교를 다니시다가
해방이 되어 온 가족이 다시 고향 산청으로 돌아오셔서 사시게 되었다.
우리 친할머니는 물론 모시고 살았던 큰아들을 제일 좋아하셨겠지만....
우리 아버지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그리고 우리엄마에게 이야기 하셨다.
" 느거 신랑은 부처님이 주신 아이다.... "
불심 깊으신 밀양박씨 할머니는 꿈에 부처님이 선물로 아이를 주셨다고 한다.
그리고 아버지를 낳으셨다.
아버지는 아주아주 잘생기셨고...젊은시절 사진을 보면 정말 잘생기셨다.
신성일 배우가 잘 생겼다고 하고 영화로 많이 봤는데....
나는 객관적으로 봐도 우리아버지가 훨씬 더 잘 생기셨다.
그리고 공부도 아주 잘 하셨다.
그리하여 부산대학교 56학번으로 법대를 나오셨고... 그당시 참 드물게 대학원까지 나오셨다.
처음에는 부산의 어떤 대학이 생기면서 교수로 가시려고 하셨는데...
돈을 당시 이천만원을 요구 하여 도저히 갈수가 없었다.
그때 아버지 대신 교수로 가셨던 아버지 친구분은 총장까지 하고 퇴임하셨다.
아버지의 첫 직장은 7급 건설부 공무원이었다.
이때가 우리 아버지의 전성기가 아니었나 싶다.
한창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하고 건설 경기의 전설이 시작된 1970년대.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되고 당시 건설부에서
"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고속도로는?" 이라는 문제를 티비를 통해 냈었다고 한다.
상품으로 그당시로는 어마어마어마한 자동차 냉장고 등등이 걸려있었고
국민적인 이벤트가 되어.... 건설부 직원들도 우편엽서를 10장 어떤사람은 100장씩
답을 적어 보냈었다고 한다.
전국 각지에서 우편엽서가 어마어마한 양으로 왔고....
전국으로 티비 생방송으로 추첨을 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추첨자는 당시 최고 영화배우 문희라는 분이 했다고 했다.
우리 아버지도 응모했었는데 떨어졌다.
어쨌든 종로 종합정부청사 건설부 계실때가 아버지 인생의 전성기였고....
그 전성기에 내가 서울에서 태어나서 나의 본적은 서울시 종로구 필운동이었다.
물론 원적은 산청.
그 1970년대 최고의 전성기 동안 건설부에서는 뇌물이 오고 갔다.
지금도 그러한데 그 시절은 오죽 했을까?
대쪽같으신 우리 아버지가 절대 용납을 못하는 부분들이고....
결국은 견디지 못하시고.... 공무원생활을 그만 두시고 부산으로 내려오셨다.
아버지랑 같이 근무 하셨던 어떤 분은 아주아주 융통성있게 잘 견디셔서
청문회에 한번씩 나오시고... 감옥도 가시고... 또 나오셔서 더 잘되시길 반복하신 분도 있다.
우리 아버지도 융통성이 좀 있으셨으면.... 세상적으로 어떤 인생을 사셨을까?
쓸데없는 상상을 살짝 살짝 해봤다.
아주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지금 양재동인 말죽거리 평당 50원 하던 시절....
개발 하는 사항은 다 알고 계셨고....
그런데 우리 조년 할아버지 형제의 금두덩이를 강물에 버린 이야기가 생각나면서
절대 일어날수 없는 일이었겠다고 생각이 든다. ㅎㅎㅎㅎㅎ
아버지는 부산에서 운수업하시던 큰아버지따라서
같은 운수업을 사셨다.
건설경기가 좋으니 쉬울꺼라 생각하신듯 하다.
큰 트럭을 샀다.
마을 한쪽 공터에 트럭을 세우고 그 앞에 돼지머리 놓고 고사를 지냈다.
나는 왜 그런지 너무너무 생각이 잘 난다.
그리고 지금 연산동 로타리가 큰 공터였고.... 거기 트럭이랑 모래더미가 있었고
모래더미는 내 놀이터였다.
사업하시고 초반에는 아버지가 집에 오실때마다
늘 거북당 제과점 빵, 만두, 과자등 항상 그냥 오시지 않으셨고...
맛있는거 사오셨다.
띵똥 하는 벨소리만 나면...
언니랑 나는 " 와...... 아빠다....." 하고 나가서
아버지가 사오신 간식을 받아들고 집에 들어가 넘 맛나게 잘 먹고 행복했었다.
그런데......
역시나
우리아버지는 사업을 해서는 안되는 분이셨다.
큰아버지 사업은 승승장구 하시는데
우리 아버지는 사업이 안되었다.
게다가 아버지트럭 운전 기사가 대구에서 일을 마치고 부산으로 바로 내려오지 않고
대전에 있는 애인 만나러 올라가다가 큰 교통사고를 내고 즉사했다.
보험도 없던 시절 차는 완전히 부서지고 운전수는 죽어서
그 가족들이 집에 찾아오고....
너무너무 힘든 시기였고...... 그렇게 운수업이 막이 내렸다.
그리고 타이어 대리점을 하셨다.
아버지는 사업이 아니라 자선 사업을 하셨다.
가방끈이 긴것이...... 정직한 것이...... 사업의 큰 장애였다.
속임수가 난무하고 돈을 안주는게 당연하고....
특히 엄마쪽 친적들은 아버지에게서 타이어 사가서 돈 안주는게 당연했고....
아빠는 어음으로 부도 막기 급급하셨다.
연산동에서 우리 아버지가 얼마나 사업을 못하셨는지는
내가 커서 남으로 부터 들었던 소문도 있다.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려면.... 체면도 버리고... 싸울수도 있어야 하고
그런건가 싶기도 하고....
그려러니 좀 덜먹고 내가 손해보는게 나을까 싶기도 하고....
하지만 우리 아버지 때문에
우리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엄마가 고생을 많이 하셨고...
특히 할아버지 땅을 많이 팔아서 부도를 막아야 했다.
아무것도 남은거 없이.... 할아버지 땅만 사라졌다.
모두 세상에 보시를 하셨다.....
다행히 우리 엄마가 선생님이셔서 그리고 교장선생님이신 외할아버지덕에
배를 굶는다던지... 집이 날라가는 일은 없었다.
아버지도 믿는 곳이 있어서 사업을 자선사업으로 하신건 아닌지 모르겠다.
세월이 흐르고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와 다 함께 살았다.
그때는 몰랐는데... 사위가 장인장모님을 모시고 산것이다.
도움을 받고 안받고를 떠나...
사위가 장인 장모님이랑 같이 살아가는것도
쉬운일은 아니었을듯 한데.....
우리 아버지에게는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자연스럽게 잘 살았고...
단 한번의 갈등도 없었다. 우리가 못본 갈등이 있었을까 싶어도 느낌이란 것이 있다.
그런것이 전혀 없었고
평화롭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었다.
그러다가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급격히 할아버지가 쇠약해지시고....
이윽고 몸져 누우셔서 일어나지를 못하셨다.
이때가 우리아버지의 진심이 발휘된 시기이다.
정말 우리 아버지는 장인이신 우리 할아버지를 잘 돌보셨다.
할아버지가 남자이시니 엄마가 어찌 할 도리가 없었고....
아버지가 병원에 업고 모시다 드리고
목욕도 아버지가 시켜드리고
단, 한번도 짜증이나 불평없이....
묵묵히 그냥 할일로 받아들이고 하셨다.
오히려 학교 나가시랴 할아버지 돌보랴...
엄마가 힘들어 하시고 힘든다는 이야기를 하시면
아버지는 그러지 말라고 하셨다.
엄마는 그때 울 아버지를 크게 존경하게 되었다.
긴병에 효자가 없다는 말.
나도 지난 해 우리 엄마 척주골절때 단 한달간 간병해보고
절실히 느꼈다.
그걸 수년간 아버지가 하신것이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아버지는 눈물을 한방울도 흘리지 않으셨다.
남자라서 그런것도 있겠지만...
아버지는 할아버지 생전에 후회없이 최선을 다해서 그런듯 하다.
우리 아버지는 세상 법칙에 하나도 안맞다고 생각을 했었다.
세상 법칙 Give and Take. 즉 주는 만큼 받기.
아버지가 사업을 그만 두신 후로는
별로 하시는 일 없이 꾸준히 운동 하시고 티비 보시기 위주로
스트레스없이 사셨다.
별 소득이 없으시니 우리들이나 누구 가족 생일에 양말 한장 안사주신다.
그래도 12월인 아버지 생신을 가장 크게 하고 제일 선물을 많이 받으신다.
우리 엄마도 아버지로 부터 받는 선물 하나 없어도
엄마옷 사러 백화점 갔다가 결국엔 아버지 비싼 외투가 손에 들려있다.
고맙다는 말도 없고....다정함이라곤 1도 없는 아버지에게 어쩜 그리 다들 잘하는지 참 신기했다.
아버지 친구분들도 아주 성공하신 분들이 많다.
아버지는 친구분들에게 베푸는게 하나도 없으신데
친구분들은 앞다투어 아버지께 전화를 하고 식사대접을 하신다.
왜 그럴까?????
좀 배우고 싶어서 관찰을 해봤다.
그랬더니....
알았다.
바로....
바로 우리 아버지가.....
부처님이었다.
아버지는 내가 잘났다는 아만심이 없으셨다. ㅎㅎㅎㅎㅎㅎ
아무 말씀이 없으신게 비결이었다.
고맙다... 미안하다.... 이런말씀도 없으시다.
그야말로 부처님이셨다.
아무 말씀 없이 그냥 법당에 딱 앉아계시면
너도 나도 가서 공양 올리고 과일 올리는 부처님... ㅎㅎㅎㅎㅎㅎ
특히 성공하신 친구분들은 서로서로 경쟁이 되는 사이끼리는
질투심도 있고.... 서로 연락도 하지 않지만...
그 두분다 아버지에게는 연락을 하시면서 상대방 욕을 하신다.
그러면 아버지는 아무 소리 없이 다 그냥 들어주신다.
실컷 욕하고 나면 시원 하신지 아버지께 밥을 사신다.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지금도 아버지는 미국가 계시면서 오늘은 캐나다 구경하러 가신다.
유럽, 미국, 일본, 동남아 각국.
시간이 많으신 아버지는 세계 가보지 않은 곳이 거의 없다.
자신이 나서서 가고자 한 곳은 한군데도 없다.
가만 있으면....
엄마가 계획 다 세워 돈 다 내어 아버지 모시고 가고....
칠순이라고 아이들이 보내드리고....
그 큰 복의 근원이 바로.............침묵이었음을 배웠다. ^^
다음에 미국에 가게 되면 내 친구 케빈을 만나서
꼭 이야기 해주고 싶다.
깊고 깊은 침묵의 위력을.^^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아버지 전성기 시절 부터시작.....
이조년 할아버지 시비와 함께 하신 아버지... 역시 은근한 미소가... 슬며시 나온다.
미국 여행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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