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

인생을 잘 살려면 /우학스님

달빛7 2020. 5. 5. 23:44
728x90







인생을 잘 살려면 /우학스님




인생을 잘 살려면
살아 있는 명법문




 
  
 




우리가 절에 다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소원 성취하기 위해서요? 마음 잘 쓰기 위해서요? 아니면 시집 장가가려고요? 예, 다 맞습니다.
우리가 절에 오는 이유는 인생을 좀더 잘 살아보기 위해서입니다. 그럼 우리가 인생을 좀더 잘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인생을 잘 살려면,


첫째 현실을 자각하고 직시해야 합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으며, 내 현주소지는 어디인가를 먼저 자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의 현재 위치를 분명히 알 때, 세상이 바로 보이는 것입니다. 만일 그런 의식이 없이 살아간다면 그것은 자기 인생에 대한 ‘직무유기’입니다.
예를 들어 가족의 구성원으로 있는 이상 그 어떤 경우에도 자기 위치와 역할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남편은 남편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자식은

자식대로 자기 나름의 할 일을 다 하며 자신들의 마땅한 자리에 있어줘야 합니다. 삶이 현실 직시와 자각에 기인하지 않으면 전도몽상(顚倒夢想), 즉 뒤집힌 꿈 같은 세상이 되고 맙니다.
현실을 직시하고 자각하는 것이야말로 나의 성장과 발전의 밑거름이 됩니다. 자신을 여실히 드러내어 관조하는 삶은 인생 자체가 언제나

상큼하고 신선합니다.



둘째, 순간순간을 목적으로 삼아야 합니다.
인생은 한 순간도 자기 것이 아님이 없습니다. 생명유지의 단초인 숨 쉬는 일부터 그렇습니다. 숨을 쉬는 데는 가타부타 이유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저 숨을 쉴 뿐이지 다른 목적은 전제되지 않습니다. 숨 쉬는 자체가 큰 의미이며 재미인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건강하기 위해서 108배를 한다면 수준이 조금 낮은 경우입니다. 절하는 그 자체가 재미있어야 합니다. 마음 가운데 부처님을 깊이 생각하면서 절을 하면, 절하는 그 자체가 재미있는 것입니다.
직장생활 또한 그렇습니다. 직장생활을 돈을 벌기 위한 목적으로만 삼는다면 그 사람은 돈의 노예이지 스스로 자기 인생의 주인공은 못 되는 것입니다. 주인공은 돈에 신경 쓰기보다는 하는 일 자체에 신성성(神聖性)을 부여해야 합니다. 현재적 삶, 당념(當念)의 고귀함이 직업관에 살아있지 않으면 억지로 하며 일에 끌려 다니는 추한 모습이 되고 맙니다.
인생을 잘 사는 사람은 순간의 업무에 자기 자신을 완전히 일치시킵니다. 일과 내가 하나가 되는 삶은 그 자체가 목적이므로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재미가 한량없이 큰 것입니다.


셋째, 인연법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현재 나의 좌표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날줄과 씨줄의 만남이 이루어 낸 필연의 조화이며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놓인 그 어떤 것도 나 아닌 것이 없으며 무가치한 것은 없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산야에 핀 들꽃 한 송이라도 일단 나의 오감(五感)에 잡히는 순간부터 그것은 나의 꽃이요, 나의 분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연법을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은 절대 경거망동하거나 배은망덕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수직적이든 수평적이든 자신을 둘러싼 모든 인연들은 귀찮은 대상이 아니라, 나를 나 되도록 하고 나를 성장시켜 주는 장엄물인 것입니다. 내 삶의 진정한 가치는 나와 인연된 사람들, 이웃들과 함께 할 때 더욱 빛나며 풍요로울 수 있습니다.
나이 채 40이 안 되어 돌아가신 젊은 보살님이 있었습니다. 그 보살님이 돌아가시기 2, 3일 전에 꼭 저를 한 번 만나야겠다고 해서 그 집에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방에 마주 앉아 한 시간 정도 대화를 하는데 그 보살님 하는 말이, 자기는 몸이 성치 못해서 이웃을 위해서 봉사를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죽는 것이 정말 한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 때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그 이후로도 임종을 앞둔 여러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들 대부분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사는 동안에 남을 위해서 뭘 좀 했어야 했는데 그것을 못해서 한스럽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진실해지고 솔직해지거든요. 결코 빈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 이후로도 인연법에 가치를 두는 경우를 많이 봐왔습니다. 우리는 인연법을 늘 소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봉사를 해야 하고, 또 부처님 법과의 인연관계를 소중히 여겨 부처님을 찬탄하고 감사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아는 사람과는 신의를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째, 끊임없이 정진해야 합니다.
제 친구 가운데 우리나라에선 침술의 일인자로 불리는 한의사가 있습니다. 한 번은 그 친구에게 ‘일침의 근본 원리를 어디서 터득했느냐?’고 물어봤더니, 동의보감을 보고 배웠다고 했습니다. 그 친구가 보는 동의보감 책을 살펴보니 수백 번은 넘게 봤을 것 같은 흔적이 있었습니다. 형광펜으로 긋고 연필로 긋고 볼펜으로 긋고, 그래서 완전히 너덜너덜해져 있었습니다. 책이 아이들 낡은 영어단어장 같았습니다.
제가 그 친구에게 ‘그래도 너 또 보냐?’고 했더니, 그 친구 대답이 볼 때마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럼 언제까지 이 책을 볼 거냐?’ 하고 물었더니, 그 친구 말이 허준 선생님의 경지 이상으로 올라갈 때까지는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보면 볼수록 작년의 자기 실력이 다르고 올해의 자기 실력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안다고 그것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 보는 것이지요. 계속 반복해서 보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것이 끊임없이 정진하는 것입니다.
경전도 마찬가지입니다. 금강경 같은 경우, 제가 스스로 한 강의만도 수십 번이었는데, 강의를 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 달라집니다. 절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삼배 드리는 것하고, 내일 삼배 드리는 것하고는 차원이 다릅니다. 같은 삼배인 것 같지만, 그 느낌이 다릅니다. 오늘 다라니 읽는 것하고, 내일 다라니 읽는 것하고는 다릅니다. 똑같이 하는 독송이지만 다릅니다. 같은 책을 보더라도 볼 때마다 생각이 달라집니다.
그렇게 끊임없이 정진하는 가운데 내 인생이 바뀌는 것입니다. 지금 현재 잘 살고 있더라도 끊임없이 정진해야 합니다.

다섯째, 원(願)을 세워야 합니다.
‘원’이 없는 사람은 의지가 없는 바윗덩어리, 나무토막과 같습니다. 산송장일 뿐입니다. ‘원’은 인생의 목표이며 희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원’과 ‘욕심’은 그 개념이 다릅니다. 불교에서는 그 목표와 희망이 개인적·소아적일 때 ‘욕심’이라 하고, 전체적·우주적일 때 ‘원’이라고 합니다. ‘욕심’이란 것은 개인적 ‘이익’에 기인하지만, 원이란 공공의 복리와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원’이 있는 사람은 그 인생의 빛깔이 다릅니다. 매사 긍정적이며 활기에 차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 씀씀이도 따뜻하며 늘 이웃들에게 칭찬을 듣습니다. ‘전체가 행복할 때 나도 행복하다’라는 대아적(大我的) 인생관과 ‘이웃이 아프니 나도 아프고, 이웃이 기쁘니 나도 기쁘다’라는 불이(不二)의 소식은 곧 사랑이며 자비입니다.
세상의 빛이 되고 귀감이 되는 사람은 그 삶의 스케일이 커서 자기 집착과 욕심을 떠나 있습니다. 인생을 잘 살려면 ‘원’을 세우고 실천해야 합니다.


- 『우학 스님의 빛깔 있는 법문』중에서


------------------------
우학 스님 영충총림 통도사에 출가하여 성파 대화상을 은사로 득도하였다. 대학에서 선학을 전공하였으며 선방, 토굴, 강원, 무문관에서 참선 등 정통 수행을 체계적으로 닦아왔다. 성우 대율사로부터 비니 정맥을 이었다. 현재 영남불교대학·大관음사에서 회주의 소임을 맡고 있으며, 오래 전부터 간화선을 한 단계 발전시킨 선관쌍수로써 후학들을 지도하고 있다. 저서로는 『저거는 맨날 고기 묵고』, 『금강경 핵심강의』 『새로운 불교공부』, 『완벽한 참선법』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