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

만공스님 법문

달빛7 2019. 11. 12. 2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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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세 인생(現世 人生)에 대하여 / 만공스님





 

 

인간의 일생은 짧은 한 막의 연극에 지나지 않는데, 이 연극의 한 장면이 막이 되면

희노애락(喜怒哀樂)을 연출하던 그 의식은 그만 자취 없이 사라져 버리고

육체는 부글부글 썩어버리니, 이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이 허망하기 짝이 없는 그 동안인들 일분의 자유가 있었던가?

밥을 먹다가라도 불의(不意)의 죽음이 닥치면 씹던 밥도 못 삼키고 죽어야 하고,

집을 아무리 많은 돈을 들여 찬란하게 짓다가도 느닷없이 화재(火災)라도 만나면

방 안에 한 번 앉아 보지도 못하고 허망하게 되지 않는가?

 

직접 내 자신의 일에도 이렇게 늘 자유를 잃어 버리는데

인생의 집단인 사회와 국가를 세운다는 일이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자유의 바탕을 얻어야 근본적 자유를 얻게 될 것이 아닌가.

자유가 어디에서 얻어지는지도 모르는 인간들이 자유를 부르짖는 것은,

쌀도 없이 밥을 지어 배부르게 먹는 이야기만으로 떠드는 셈이니라.

 

인생은 자기 업신(自己業身)의 반영(反映)인 이 몽환(夢幻) 세계를 실상(實相)으로 알고

울고 웃고 하는 것은 마치 은행나무가 물에 비치는 제 그림자를

이성(異性)으로 감응(感應)하여 열매를 맺는 것과 같으니라.

 

인간이 산다는 것은 생의 연속이 아니라, 생멸(生滅)의 연속으로

인간이 죽는 순간도 죽기 전후 생활도 다 잊어 버리고,

입태(入胎), 출태(出胎)의 고(苦)도 기억하지 못하고,

다만 현실적 육식(六識)으로 판단할 수 있는 이 생활만 느끼고 사는데,

 

천당에 갔다가 지옥에 갔다가 사람이 되었다가 짐승으로 떨어졌다가 하는

그러한 생이 금세 지나가고, 또 한 생이 금세 닥쳐오는 것이

마치 활동 사진의 영상(影像)이 연속해 교환 이동되어

빠른 찰나에 다른 장면으로 나타나는 것과 같으니라.

 

인생은 과거를 부를 수도 없고, 미래를 보증할 수도 없는 것이다.

현재가 현재이기 때문에 현재를 완전히 파악하게 되어야

과거, 현재, 미래의 생활을 일단화(一單化)한 생활을 할 수 있나니라.

 

인생은 과거에 사는 것도 아니요. 미래에 사는 것도 아니요.

다만 현재에만 살고 있는데,

현재란 잠시도 머무름이 없이 과거에서 미래로 이동하는 순간이니,

그 순간에 느끼는 불안정한 삶을 어찌 실(實)답다 할 수 있으랴!

 

과거와 현재가 합치된 현실이 있나니

현재는 과거의 후신(後身)이요, 미래의 전신(前身)으로

과거, 현재, 미래가 하나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를 중심으로 하여 위로 상상할 수 없는

최고 문화세계가 헤아릴 수 없이 벌어져 있고,

아래로 저열극악(低劣極惡)한 그 양과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지옥의 세계가 다 함께 몽환 세계(夢幻世界)인 것이니,

과연 어떤 것이 실세계(實世界)인지 그것을 알아 얻는 것이

곧 진아 세계(眞我世界)를 체달(體達)하게 되는 것이니라.

 

나의 현재 생활이 일체(一切) 세계라,

현재 생활에서 자족(自足)을 못 얻으면 다시 얻을 도리가 없나니라.

 

인간들은 모두 자기에게는 좋은 것이 와야 할 희망을 갖고 생을 이어 가지만

좋은 것을 취하는 것이 곧 언짢은 것을 얻는 원인인 줄을 알지 못하나니라.

인간 생활의 주체(主體)가 되는 생로병사(生老病死)와 희노애락(喜怒愛樂)까지도

다생(多生)으로 익혀 온 망령된 습관의 취집(聚集)이요 결과임을

확실히 깨달아야 생사를 벗어나게 되나니라.

 

이 우주에는 무한 극수적(無限極數的) 이류 중생(異類衆生)이 꽉 차서

각각 자기 습성에 맞는 생활권을 건립하고 있지만,

우리 육식(六識)은 다생(多生)의 습기(習氣)로 점점 고정화(固定化)하여

우리 사바 세계 인간으로는 어느 한도를 넘어서는

도저히 볼 수 없고, 느낄 수도 없나니,

 

천인(天人)이니 지옥이니 신(神)이니 귀(鬼)니 하는 것도

결국 우리 육식으로는 판단할 수도 없는 이류 중생의 명상(名相)이니라.

 

습관은 천성이라 천재(天才)니 소질(素質)이니 하는 것도

다생으로 많이 익혀서 고정화하여 이루어진 것인데,

이것이 바로 업(業)이라는 것이다.

 

물체는 결합(結合), 해소(解消)의 이중 작용(二重作用)을 하기 때문에

영겁을 두고 우주는 건괴(建壞)되고, 인생은 생사를 반복하고 있나니라.

 

중생이라 하는 것은 한 개체에 국한된 소아적(小我的)인 생활을 하는 사람짐승, 벌레 등으로

일체 자유를 잃어 버리게 되어 다만 업풍(業風)에 불려서

사생 육취(四生六趣)에 헤매게 되는 것이요,

 

(佛)이라 하는 것은 일체 우주를 자신화(自身化)하여 일체 중생이

다 내 한 몸이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가 다 내 한 집이라,

어느 집이나 어느 몸이나 취하고 버리는 것을 내 임의로 하나니라.

 

완인(完人)은 만유(萬有)를 자체화(自體化)하였기 때문에

만유의 형상을 임의로 지으며, 만유의 도리를 자유로 쓰게 되나니라.

천당은 갈 곳이요, 지옥은 못 갈 곳이라면 우주가 내 한 몸이요,

천당과 지옥이 내 한 집인데, 중생은 한 세계를 두 세계로 갈라 놓고,

한 몸을 분신(分身)시켜 천당, 지옥으로 나누어 보내는데,

이것은 중생의 업연으로 됨이니라.

 

인격(人格)이 환경에 휘둘리는 사람은 영원한 평안(平安)을 얻을 길이 없나니라.

세상 사람들은 똥과 피의 주머니로 몸을 삼아

춥고 덥고 목마르고 배고픈 것만 귀중히 여기기 때문에

길이 윤회(輪廻)의 고취(苦趣)를 면치 못하나니라.

 

우리가 느끼는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의 육식은

장소에 따라 변하고, 때에 따라 흩어지나니,

이렇게 시시 각각으로 천류(遷流)하는 육식으로 어찌 인생이 근본 정신을 파악할 수 있겠는가?







만공스님 법훈



《만공스님 法訓》- (1) 나를 찾아야 할 필요와 나



1. 사람이 만물 가운데 가장 귀하다는 뜻은 나를 찾아 얻는 데 있나니라.

 

 



2.  나라는 의의가 절대자유(絶對自由)로운 데 있는 것으로,

    모든 것은 내 마음대로 자재(自在)할 수 있어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은 어느 때, 어느 곳에도 자유가 없고,

    무엇 하나 임의(任意)로 되지 않는 것은 망아(妄我)가 주인이 되고

    진아(眞我)가 종이 되어 살아 나가는 까닭이니라.

 

 



3. 망아는 진아의 소생(所生)인데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마음은

    곧 사심(邪心)이요, 진아는 정심(正心)으로 시종(始終)도 없고,

    존망(存亡)도 없고, 형상(形象)도 없지마는

    오히려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나이니라.

 

 



4. 사람이 나를 잊어버린 바에야 육축1)으로 동류(同類)되는 인간이라

   아니 할 수 없나니,

   짐승이 본능적으로 식색(食色)2)에만 팔려서 허둥거리는 것이나,

   제 진면목(眞面目)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현실에만 끌려서 헤매는 것이나, 무엇이 다를 것인가?

   세상에서 아무리 위대하다는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자기면목(自己面目)을 모른다면

   사생육취(四生六趣)3)에 윤회(輪廻)하는

   한 분자(分子)에 지나지 아니하니라.

 

 



5. 동업중생(同業衆生)이 사는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는

   너와 내가 다 같은 생활을 하기 때문에

   사람 사는 것이 그저 그렇거니 하고 무심히 살며,

   자기들 앞에 가로 놓인 무서운 일을 예측하지 못하고

   그럭저럭 살다가 죽음이 닥치면 전로(前路)가 망망하게 되나니라.

 

 



6. 나라고 하는 것은 “아무개야!”하고 부르면

  “네!”하고 대답하는 바로 그것인데 그것은 生死(생사)도 없고,

  불에 타거나 물에 젖거나 칼에 상하는 것이 아니어서

  일체 얽매임을 떠난 독립적인 나이다.

 

 



7. 인생은 말꼬리에 매달려 울며 딩굴려 가는 죄수처럼

   업(嶪)의 사슬에 끌려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고(苦)의 길을

   영겁(永劫)으로 순력(巡歷)하고 있는데,

   그 쇠사슬은 자기의 지혜 칼이라야 능히 끊어 버릴 수 있게 되나니라.



8. 사회에서 뛰어난 학식과 인격으로 존경 받는 아무러한 사람이라도

   이 일4)을 알지 못하면 기실 사람의 정신은 잃어버린 인간이니라.

 

 



9. 석가세존(釋迦世尊)이 탄생시에 산석(産席)에서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또 한 손으로 땅을 가리키며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 하신

  그 ‘아(我)’도 나를 가리킨 것이니라.

 

 



10. 각자가 다 부처가 될 성품은 지니었건만,

   내가 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부처를 이루지 못하나니라.

 

 



11. 일체가 다 나이기 때문에 극히 작은 하나의 털끝만한 정력이라도

   이 나를 찾는 이외의 어떤 다른 것에 소모하는 것은 나의 손실이니라.

 

 



12. 누구든지 육신(肉身), 업신(業身), 법신(法身) 세 몸을 지녔는데,

   세 몸이 일체가 되어 하나로 쓰는 때라야 올바른 사람이 되는 것이니라.

 

 



13. 일체 행동은 법신이 하는 것이나,

   육신과 업신을 떠난 법신이 아닌 까닭에

   현상 그대로가 곧 생사없는 자리이니라.

 

 



14. 생사 없는 그 자리는 유정물(有情物)이나 무정물(無情物)이

   다 지녔기 때문에 한 가닥 풀의 정(精)이라도

   전우주의 무장(武裝)으로도 해체시킬 수 없나니라.

 

 



15. 세상에는 나를 알아보느니 찾아보느니 하는 말과 문구(文句)는 있으나,

   업식(業識)으로 아는 나를 생각할 뿐이요,

   정말 나는 어떤 것인지 상상조차 하지 못하나니라.

 

 



16. 나는 무한극수적(無限極數的) 수명을 가진 것으로,

   죽을래야 죽을 수 없는 금강불괴신(金剛不壞身)5)이라

   이 육체의 생사는 나의 옷을 바꾸어 입는 것일 뿐,

   인간이라면 자신이 소유한 생사의 옷쯤은

   자유자재(自由自在)로 벗고 입을 줄 알아야 되나니라.

 

 



17. 보고 들어서 얻는 지식(知識)으로서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니라.

   나라는 생각만 해도 그것은 벌써 내가 아니니라.

 

 



18. 나는 무념처(無念處)6)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니,

   그것은 무념처에 일체유(一切有)가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19. 부처를 대상으로 하여 구경(究竟)7)에 이르면

   내가 곧 부처인 것이 발견되나니,

   결국 내가 나 안에서 나를 발견해야 하나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