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울 할아버지 이야기.

달빛7 2019. 9. 11.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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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인생을 살아오면서 생각하지 않아도

떠오르는 소중한 분들이 있을것 입니다.

달빛에게도 너무너무 소중한 그리고 공기같이 소중함을 몰랐던...

그런 분들이 있습니다.

특히 달빛 인생에 익스페샬 땡스를 백만개 드려도 모자라는 두분이 계십니다.

저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입니다.

앞의 블로그 어떤 재판이야기에 나오시는 두분입니다.

오늘은 외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떠올려봅니다.

앞으로도 계속 외할아버지의 기억을 최대한 모아 보려 합니다.

저의 외할아버지의 아버지 즉 증조 외할아버지는 글을 모르셨습니다.

일명 까막눈이셨는데...

문서를 읽지못해 지인에게 속아서 땅을 빼앗기셨습니다.

그 울분으로 다섯아들을 두신 증조 외할머니는 공부머리가 없으신 둘째 아드님을 제외하고는

아들들 공부를 엄청 시키셨습니다.

아주 아주 가난하였지만...

큰아들은 공부를 잘하여 만주국 어느 큰 역의 역장이 되셨고

둘째아들은 농사를 이어받으셨고...

울 할아버지이신 세째아들은 뛰어난 머리를 가지시어 혼자 힘으로 일본 오사카

에서 유학을 하십니다.

유학후 우리나라로 돌아오시어 은행에서 일을 하시다가

어느 아름다운 봄날, 아이들을 데리고 소풍을 가는 어떤 선생님의 모습을 보시고 반하여...

선생님이 하고 싶어지셔서 시험쳐서 국민학교 선생님이 되셨고.

선생님이 된지 얼마되지 않아 젊은 나이에 교장선생님이 되셨습니다.

네째아들은 고등학교 미술선생님을 하시어 훗날 달빛의 손공자수 창시자이시자

스승님이 되셨고...

막내아들은 정말 정말 특출나게 뛰어나서 진주 정촌소학교 시절

일본인 교장이 추천하여 국비로 일본 도쿄 유학을 떠나 일본에서

정착하시어 사업을 하여 엄청난 거부가 되어 집안의 큰 기둥으로 자라나셨습니다.

결과만 보면 증조 외할아버지께서 까막눈이어서 글을 읽지 못한것이 큰 축복이

되어버렸습니다.^^

증조 외할아버지께서 땅을 잃지 않았다면.... 그 당시

그렇게 전투적으로 다섯 아들들을 공부시키지 않으셨을듯 합니다.

그때 그렇게 공부를 하신 다섯 아들들의 자녀들과 그 아래 우리대까지

그 영향을 받아서 지금도 의사, 교수, 선생님 등등 대부분의 후손들이 잘 살아가는 씨앗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멀리 본다면 어떤일에 일희일비하지 않아야겠다 생각이 듭니다.

인생은 뿌린대로 거둔다.

정말 과학인듯 합니다.

울 할아버지는...

딱 100년전...

1919년 진주 정촌에서 어느 가난한 시골집 세째 아들로 태어나셨습니다.

공부는 곧잘 하셨지만... 성격이 급하시기가 불같으셔서....

외할머니가 시집가셨을때

중학생이던 막내시동생이 " 형수님 울 형님 성질 급한데 우짤래요? "

걱정을 해주었다 합니다.

하지만 성격이 급하신만큼 뒷끝이 없으신 할아버지와

무던하고 맘이 넓으신 할머니는 정말 원앙, 잉꼬처럼 한 평생 넘 행복하게

사셨습니다.

저도 울 할아버지 성격을 그대로 이어받아 쉽게 끓어오르고 쉽게 식어버립니다.^^

저의 어머니는 저의 성격을 끓는 냄비라고 표현을 하시곤 합니다. ㅎㅎㅎ

하지만... 성격이란것도 변하는 성질의 것이더군요.

제 기억속의 할아버지는 제가 3살즈음 경남 선진국민학교 교장선생님이셨을때

기억부터 시작입니다.

믿기 힘들지만... 저는 저의 어린시절 기억이 너무 선명하고 또렸하고

기억이 많이 납니다.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저의 할아버지는 사진찍는 취미가 있으셔서

어린시절 사진이 많이 있습니다.

한번씩 앨범을 보곤 했던것들이 머릿속에 저장이 되어서 누구보다도 어린시절을

잘 기억하고 있는것 같습니다.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저도 사진을 좋아하는것 같습니다.^^

To be continued

울 할아버지는

오사카에서 하숙을 하셔면서 대판 상업고등학교를 다니셨습니다.

학비를 벌기 위해 하루에 학교가는 시간 외에는 늦은 밤까지

일을 하셨습니다. 일 뿐만 아니고 공부도 열심해 해야하는데...

당시 그 학교에는 한국인 선배들이 있었는데

한국 학생의 등수가 전교 50등 밖으로 나가면 때리곤 했다고 합니다.

다들 공부를 잘 할수 밖에 었었다고 합니다.

너무나 성실한 한국 유학생을 보고는 하숙집 둘쨋딸이 반하였고

하숙집 주인도 할아버지가 한국인임에도 사위감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졸업만을 앞둔 어느날

한국에서 전보가 왔습니다.

아버지가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듣고 할아버지는 바로 짐을 챙겨

한국으로 들어옵니다.

하지만 와서 보니 아버지의 병은 거짓말이었고

할아버지의 결혼식이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 명을 거역할수 없어서 할아버지는 할머니와 결혼을 했습니다.

할아버지를 기다리고 기다리던 오사카 하숙집 둘째딸이

도쿄에서 중학교 다니던 할아버지 막내동생을 찾아옵니다.

할아버지 막내동생은 사실을 이야기했고

그 하숙집 둘째딸은 당시 전쟁중이라 귀하디 귀한 장어덮밥을 사주고

용돈을 쥐어주고는 울면서 돌아갔다고 합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로 부터는 듣지 못한 이야기이고

일본에 계시는 할아버지 막내동생으로 부터 들었던 이야기 입니다.

할머니는 몸이 약하시고 어머니를 낳고는 더이상 아기를 낳기 힘드셨습니다.

당시에는 아들이 엄청난 존재이고 주위에서 다들 할아버지보고 입양을 하든

후처를 보든 어쩌든 아들을 낳아라고 성화였습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끝까지 외동딸이 엄마만으로 만족하시었고

솜씨 좋은 할머니는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 정말 정성을 다해 할아버지

속옷까지 다 직접 만드시고 음식솜씨를 뽐내시며 평생 잘 하셨습니다.

제가 처음 기억하는 할아버지는

뚝딱뚝딱 늘 망치질을 하고 계셨습니다.

학교 건물 옆 작은 창고 그 앞 조그만 사택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 작은 창고는 완전 보물 창고 였습니다.

공, 메트리스 등등 체육용품들과 책걸상들이 쌓여있었고

할아버지는 늘 망치질을 하시면서 책상 걸상을 고치셨습니다.

교장선생님의 일이 그런 일인줄 았었습니다.

악! 소리가 나서 보면 할아버지 손톱에는 검은 멍이 들어있었고

손톱 멍은 할아버지의 트레이드 마크였습니다.^^

겨울이 되면 늘 멋진썰매도 만들어주시고

겨울 방학숙제도 연필꽂이, 곤충채집통등 늘 이것 저것

만들어 주셔서 할아버지 덕분에 멋진 방학 숙제들을 했습니다.

일본에서 티비를 보내주어서

작은 사택에 티비가 있었지만 아주 어린시절엔 그냥 무용지물이었고

티비 다리를 돌려서 뽑아 밀가루 반죽을 밀어

칼국수 만들어 먹을때 쓰건 물건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봉계국민학교 갔을때 티비가 나왔습니다.

처음으로 봤다고 기억나는 티비프로는

별셋 아저씨가 주제가를 불렀던 전쟁 드라마 전우

"간다~~~~ 우리는~~~~" 으로 시작하면 이유없이 눈물이 흘렀던 프로 입니다.

그리고 미국 드라마 전투 입니다.

영화를 좋아하시고 사진을 좋아하시던 할아버지덕분에

늘 극장을 다니면서 손오공과 오로라공주, 태권브이 만화영화 뿐 아니라

숀코넬리의 007도 다 보고 다녔습니다.

사택 작은방에서 티비를 보다가 늘 잠이 많은 언니는 먼저 잠이 들어버립니다.

저는 끝까지 말똥거리면서 전혀 잠이 오지 않는 스타일이었습니다.

그러면 할아버지는 이불을 펴시고 언니를 안아서 이불위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십니다.

하루는 그게 너무나 부러워서 저도 한번 잠이 든척 누워 있었습니다.

역시 할아버지는 이불을 깔아서 저를 안아 옮기시는데....

나도 모르게 빙그래 웃음이 나와 들키고 말았습니다.

작지만 따뜻한 방의 이불안에서 까르륵 거리든 작은 기억들이

너무나 행복했고 소중합니다.

어느해 정월 초하루날 새벽이 되었습니다.

다들 할아버지 큰집에 갈 준비를 마치고 다솔사역에서 진주가는

기차를 타러가려고 하던 때였습니다.

양반다리로 앉아 하품을 하고 계시던 할아버지 앞에 다섯살난 달빛이

할아버지 얼굴을 두손으로 감싸면서 했던말...

" 할아버지 꼭 원숭이같다."

이 한마디에 할아버지는 화를 엄청 내셨습니다.

그냥 하품하시던 할아버지 얼굴이 원숭이 같아서 원숭이 같다고 했을 뿐인데....

뭘 잘못했는지 전혀 모르겠는데?????

어쨌든 그때는 잠시뒤 뒷끝 없으신 할아버지랑 손을 잡고 기차타러 갔습니다.

몇해 뒤 제 여동생이 할아버지에게 안겨서 똑 같은 짓이랑 똑 같은 소리를 하고는

머리를 얻어 맞았습니다. ㅎㅎㅎㅎ

할아버지께는 두번째 같은 모욕이었을꺼고....

동생은 아무 이유도 모르고 머리를 맞았고......

수십해가 지나고 동생이 머리 맞은 이유를 알게 되어 함께 엄청 웃었습니다.

봉계 국민학교 아래 원전 약방이 있습니다.

약방이라 적고 슈펴도 함께 하는 만물상이었습니다.

아직도 그자리에 약방이 자리를 지키고 있어서 엄청 반가웠습니다.

어릴때 팔이랑 다리가 접히는 부분이 가려워 할머리랑 약방을 갔더니

약방 아저씨가 보시고는 " 학교가면 다 낫습니다. " 라고 했는데

정말 국민학교갔더니 나아서 참 신기해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아토피였던거 같습니다.

어쨌든 어느날 여름 할아버지한테 돈을 받아 사이다 사러 갔습니다.

양손에 사이다 한병씩 병목을 잡고 뛰어 오다가 그만...

사이다 병으로 옆에 있던 돌을 쳐서 뻥! 하는 엄청난 소리가 났고....

넘 놀라서 아무것도 못하고 울고 있으니

할아버지가 뛰어오셨습니다.

빵 소리가 나서 바로 나인줄 아시고 달려오셨다고 합니다.

할아버지가 계시던 시골에서는 아이스크림을 팔지 않아서

할머니가 팥을 얼려 주시곤 했습니다.

어느 날 할아버지께서 조금 큰 읍내 회의 다녀오시면서

자전거 뒤에 티나콘 이라는 아이스크림 한박스를 사오셨습니다.

한여름에 집까지 오는 동안 아이스크림이 다 녹아서

냉장고 냉동실에서 다시 얼려서 먹었습니다.

부산 집에서 흔히 먹던 아이스크림을

시골에서 이렇게 어렵게 먹으면 얼마나 더 맛있는지 모릅니다.

할아버지 옷장 맨위에는 필름통들이 있습니다.

사진을 많이 찍으시는 할아버지는 항상 필름을 많이 구입해 놓으셨습니다.

다쓴 필름 빈통에는 동전을 가득 넣어두시고는

언니랑 저랑

" 할아버지 돈10원만..." 을 외칠때마다 그 필름통에서 돈을 꺼내

주셨습니다.

그러면 시골 구멍가게 달려가서 오렌지껌, 아폴로, 콩알사탕 등을

사먹었습니다.

인플레이션이 엄청났던 어느해 부터인가..

늘 할아버지 돈10원만..... 에서 할아버지 돈 100원만....으로

10배가 뛰었습니다.

필름통만 봐도 행복했었는데....

요즘은 사진 필름통 보기가 힘이 듭니다.

필름통을 보면 할아버지 생각이 참 많이 납니다.

할아버지는 늘 사진을 찍어주셨습니다.

예전에는 저의 어머니가 단독 모델이었고....

우리가 태어나자 우리들로 바뀌었습니다.

봄꽃이 피면 봄꽃이랑 사진을 찍어주시고...

여름이면 물놀이 사진들이있고....

가을이면 코스모스와 단풍사진들....

겨울이면 얼음위 그리고 눈밭에서....

남해대교 개통식에서 참석해야가고.... 기념사진찍고...

제주도 여행사진도 많이 있고.....

행복한 추억으로 가득합니다.

저랑 언니는 꽃밭에 세우면 서있고

여기가라 하면 가고 저기가라 하면 가고

아무런 불평없이 잘 서고 예쁜 사진이 많이 있습니다.

제 여동생은 좀 독특해서...

한겨울 큰 눈사람이 있어서 할아버지가 손 시리도록 작은 눈사람을 굴려서

만들어 옆에 세우고는 여동생에게 눈사람옆에 서라고 하자

싫다고 서지 않게다 하자

화가 나신 할아버지는 동생 머리를 쥐어 박으셨고....

동생은 눈사람옆에 서서 얼굴을 뒤로 돌리고 찍은 사진이 있습니다.

얼마나 웃었는지 모릅니다.

그냥 서면 될껄..... 꼭 얻어 맞고 찍는 동생을 보고... 왜 그랬을까 생각했었는데...

그럴수 밖에 었는 상황이 있었습니다.

언니랑 저랑 둘이 같이 시간을 많이 보냈고....

여동생과 남동생 둘이 같이 시간을 많이 보냈었습니다.

우리가 부산 있을때는 두동생을 할아버지 할머니가 돌보시고

우리가 할아버지께 가면 두동생은 부산으로 오고.....

그런데 두 동생중 하나는 귀하디 귀한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딸셋에 아들하나...

워낙 귀하니 좋은거라는 좋은거 좋은 약이라는 좋은 약은 다 먹이는데...

풍족함 속에서는 전혀 결핍이 없고...오히려 밥대신 자기 좋아하는 과자만 먹어대서

성한 이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에 비해 셋째딸이 여동생은 같이 사는데

밥 안먹는 남동생 먹이려

은행을 후라이팬에 볶아서 하나하나 손으로 껍질을 까면

까는 족족 여동생이 다 먹어버립니다.

늘 밥안먹는 남동생이 걱정되어 할아버지 할머니가 노심초사

좋은걸 준비하면 먹으라는 남동생은 쳐다도 보지않고

먹지마라는 여동생은 마음속 결핍을 느껴서 그런지 다 먹고싶고

먹어버리고.... 혼났습니다.

어린맘에 자기를 싫어한다는 느낌때문이었는지....

여동생은 할아버지에게 복수를 합니다.

할아버지 슬리퍼 한짝을 고물상에 팔아 엿바꿔 먹고

한짝은 강물에 던져 버립니다.

첨에 두짝을 고물상에 가져가니 안받아준다는걸 알고는 머리를 써서

한쪽만 엿바꿔 먹었다고 합니다.

할아버지는 허구헌 날 슬리퍼 사러 진주 장에 가셨습니다.

어린시절 두 동생 사진을 보면

여동생은 하얀 복돼지처럼 뽀얗고 통통하고....

남동생은 꺼실꺼실하이 마르고 이빨도 다 썩어있고.....

결과는 할아버지 할머니 의도와는 정 반대가 되어 있었습니다. ㅎㅎㅎㅎㅎ

귀할수록 대충 키우고 배고프게 해야 한다는.....^^

어린시절 고뇌가 많고.... 결핍이 많았던 여동생은

너무나 똑똑해서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을 졸업하고....

시험이란 시험은 죄다 붙어서 삼성도 다녀보고 엘지도 다녀보고 국정원도 가보고... 영화사도 다녀보다가....

최고로 좋은 엄마가 되어 아이들이 키우다가....

사회인이 되어 민원을 열심히 들어주다가.....

또 공부를 하여 무슨 시험을 쳐서 1등이 되어

미국에서 연수를 하고 있습니다.

어린시절 할아버지로 부터 맞은 적이 있는 우리 엄마와 우리 여동생이

가장 공부 잘하고 성공 하였습니다.

그럴줄 알았으면 언니랑 저도 좀 맞고 크는건데......ㅎㅎㅎㅎㅎ

인생은 알수 없다고....

좋은일이 안좋은 일이 되고 안좋다고 생각한 것이 정말 좋은 결과가 되는듯 합니다.

할아버지는

사천 정동국민학교에서 정년퇴직을 하시고

부산에서 같이 사시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1층 할아버지 할머니는 2층에서 사시면서

꽃을 많이 키우시고... 특히 가을엔 국화 전시장을 방불케 하는 꽃밭으로

만드셨습니다.

강아지도 키웠는데....

우리는 강아지를 안고 만지고 예뻐라만 하고...

정작 강아지 밥주고 똥치우는 일은 할아버지가 다 하셨습니다.ㅎㅎㅎ

할아버지 할머니는 교회를 다니기 시작 하셨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믿으시는 하느님은 어떤 하느님인지

잘 모릅니다.

어쩼든 늘 교회 가자고 하셔서 안간다고 하면

교회가는 길에 지나가는 시장통 떡볶기와 순대 사준다 하셔서

따라가드리곤 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시대에는 특히 일제시대 그리고 독재시대에는

좋은 말로는 겸손의 시대이고....

안좋게 표현하면 억압의 시대로 누군가가 늘 지시하고

따라가는 세대였습니다.

자기 주장을 내려놓고 옳고 좋던간에 따라야 한다는..... 미덕도 있지만...

그 미덕이 교회까지 이어져서 순종이 되었습니다.

마음속 신을 만나는 일은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는 순종하는 삶을 사시고 매 순간 행복하게

살아가셨습니다.

할아버지는 할어니가 돌아자시자...

할아버지는 세상의 의미를 살아가는 끈을 팍 놓아버리셨습니다.

한평생 너무나 원앙처럼 어딜가도 함께 다니고 하셨던 두분이라

한분이 먼저 돌아가는것을 상상도 못해 봤었는데...

할머니가 안계시니.... 갑자기 건강하시던 할아버지께서

급격히 쇠약해 지셨습니다.

할아버지께는 할머니가 하느님보다 더 큰 의미였고 더 큰 종교였었던

것입니다.

할머니 장례식 날짜가 교회 부흥회랑 겹치게 되자...

그 교회 목사는 교인들에게 할머니 장례식장 참석하지 말고

부흥회 참석하라고 합니다.

할머니 장례식은 세상일이고 부흥회는 하나님 일이라고 하면서....

그리고 교회 목사님에게 엄청 실망을 하게 됩니다.

내가 하나님이면.... 한평생 나를 위해 기도하고 이웃을 위해 기도한

내 이웃이자 친구가 우선일까???

아님 내 사업을 위해 온 처음 본 사람이 우선일까???

그리고 병원에 입원을 하시고 퇴원하시길 반복하시다가

병원에 계실때 미국에서 돌아와 할아버지를 뵈었습니다.

그때 이미 기력도 없으시고 힘도 없으시고 마음이 너무 아팠고...

할아버지 뵙자 눈물이 났습니다.

그때 돌아가시기전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은....

" 밥먹었나? 밥무라."

할아버지가 우리 할아버지셔서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맨 오른쪽이 울 할아버지. 맨 왼쪽이 울 손공자수 스승님 율당 조승래할아버지.

부모님과 함께 가족사진.






가운데 울 할아버지 오른쪽이 율당 조승래할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가운데 울 할아버지 아래 울 할머니 옆에 울 엄마.






















울 할아버지가 찍어주신 사진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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