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

해동선원

달빛7 2012. 9. 13.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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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 해동선원에서의 하안거

2005년 여름 하안거

 

 

 

 

 

 

 

 

 

 

 

 

 

 

 

산청 하안거 1

 

집에 돌아왔다.

하안거는 8월19일에 끝나지만 몇일을 남겨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꿈같은 3개월이 훌쩍 떠나버렸다. 그러나 나에겐 너무도 소중한 3개월이었다.

5월 21일 토요일 모두들 법장스님의 법문을 들으러 떠나시고 무상사에는 서오스님과 혜통스님만 계셨다.

무상사에서의 생활을 접고 새로운 하안거 준비로 부산으로 내려가는 날이었다.

이번 하안거는 산청에 있는 해동선원에서 지내겠다고 말씀을 드리니 예쁜걸망안에 적삼2벌과 바지 2벌 그리고 동방의 하나 양말한켤레를 넣어주시면서 "이거면 충분히 안거 날수 있을꺼예요" 하시면서 예쁜봉투에 차비까지 넣어주신 서오스님.

"기차안에서 읽어보세요." 하시면서 노란 큰 봉투를 내밀어 주시는 혜통스님.

그리고 성수큰스님과의 인연을 맺어주시고 대전역까지 차를 태워주시면서 배웅해주셨던 현공거사님.

대전역에서 기다리셨다가 광월이 나타나자 빵사주시면서 플랫포옴까지 마중나와 주신 민경보살님.

감사합니다.

기차안에서 혜통스님께서 주신 봉투를 열어보았다.

만공스님의 '法訓'이라는 제목의 프린트물이었는데 읽어보니 머리에 전기가 찌릿찌릿 오면서

내가 왜 나를 찾아야 하는가 어떻게 찾아야 하는가 에 관한 소중한 말씀들이 있었다.

그리고 우아한 관세음 보살님의 모습이 그려진 우편 엽서 한장이 들어 있었다.

평소 말씀이 많지 않으신 혜통스님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졌다.

다음날 경주로 가는 시외 버스를 탔다. 경주에 도착하여 택시를 타고 흥륜사로 갔다.

흥륜사는 이차돈이 순교할때 잘렸던 목이 떨어졌던곳에 지어진 절인데

남산이 멀리 병풍처럼 보이는 벌판에 있있다.

바람이 좀 많이 불고 있었다.

큰 숨을 한번쉬고 일주문을 들어 섰다.

스님들의 선방에서 정진중이신지 절은 조용했다.

종무소 가니 안경을 쓰신 원주스님이 계신다.

절을 하고 서오스님께서 주신 봉투하나를 드리고 혜해노스님을 뵙고 인사를 드리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잠시뒤 안내 되어서 혜해노스님을 뵈었다.

자그마하신 키에 밝고 따뜻한 웃음을 보이시면서 반겨주셨다.

" 와! 참 키가 크네요. 어떻게 왔어요?"

"서오스님께 말씀듣고 인사 드리러 왔습니다." 하자

"들어요" 하시면서 수박이랑 떡을 내 앞으로 밀어주셨다.

"스님, 제가 누군지 정말 궁금합니다."

"그렇지, 자기가 자기를 모르면 편치가 않지."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침묵이 되었다.

' 스님이 되고싶습니다.' 하는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하지만 혜해노스님을 대하고 있으니 도저히 그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스님께서 내 맘을 꿰뚫어 보고 계신듯했다.

일말의 망설임을 들킨듯하여 혼자 부끄러웠다.

"마음공부를 하는데 꼭 스님이 되는 것이 나은가요?"

엉뚱한 질문이 툭 튀어 나와 버린다.

"머리를 자를수 있겠어요?"

광월은 침묵이다.

"그렇지요. 여자에게 있어서 머리카락은 생명이지. 생명이야."

하신다.

광월은 여전히 침묵이다.

"나는 낼모레 금강산 갑니다."

하시면서 환한 미소를 지어 주시는 혜해노스님앞에서 광월이는 바보가 된듯 했다.

"스님 금강산 잘다녀오세요. 담에 또 인사 드리러 오겠습니다." 하고 삼배를 드리고 스님방을 나왔다.

스님께 감사드렸다.

스님을 대면하니 내 마음속에 갈등이 녹아나는 듯했다.

스님이 되고 싶은것도 나의 욕심이었다.

사람들의 타고난 그릇이 있고 그 그릇에 맞추어 만족하고 살면 되고, 또 그 그릇을 넓히는 노력을

해가면 되는데 아직 나의 그릇은 스님이 되긴 좁다는것을 확인하고 인정했다.

원주 스님께서 공양실로 안내해주셨다.

그리고 행자님들이 점심공양을 차려주셨다. 4명의 행자님들 가운데 서진 행자님은 지난 동안거때 한방을 썼던 수경씨다. 오렌지색 행자복에 얼굴은 눈부시게 빛이 나고 있었다.

아름다웠다.

점심공양은 넘 맛있었고 함께 과일도 먹고 도라지도 다듬었다.

한 행자님은 역시 무상사에서 안거를 하신분인데 캐세이 퍼시픽 승무원이었다.

반짝이는 눈을 가지신 이 행자님도 지난 안거는 해운정사 진제 큰스님께 지도 받고 진제 큰스님께서 여기 흥륜사를 추천해 주셔서 이곳으로 왔다고 했다.

자기의 길을 잘 찾아서 한발한발 가는 이분들의 눈은 빛이나고 있었다.

힘들고 고단한 하루하루에 아름다움과 자신감이 더해가는 것일까?

다음날 짐을 챙겨서 산청 해동선원으로 왔다.

총무스님 뵙고 안거 신청서를 작성하고 성수 큰스님께 인사를 드렸다.

 

 

 

 

산청의 하안거 2

 

여기 해동선원은 무상사와 많이 달랐다.

일단 연령대가 다 높으시다. 주로 40대 후반에서 85세 까지 계셨다.

내 나이에 무상사 가면 아주 큰 언니쪽 이였는데 여기서는

나의 법명 광월이는 사라지고 모두다 "애기보살"이라 부르면서 예뻐해 주셨다.

예뻐 해주시는 것은 좋은데 어린사람이 우째 이런곳에 왔노? 하시면서 돌아가시면서

오데서 왔노?

뭐하던 사람이고?

나이는 맷살이고?

시집은 안갔나? 등등의 질문이 끊이지 않으셨다.

하는수 없이 총무스님께 부탁드려서 묵언 표시를 가슴이 크게 달고 나녔다.

그리하여 한숨을 돌리고 나에게 집중을 했다.

해동선원은 산청 금서면에 위치하는데 지리산 자락이 한눈에 펼쳐져 있고 반대편에는 황매산자락이 펼쳐져 있고 앞은 웅석봉 뒤의 필봉산으로 웅장한 산들에 둘러 싸여 있는 폐교를 개조하여 만든 선방이다. 그리고 성수 큰스님께서는 과거 큰 스님들께 맞아 죽을 각오로 묻고 또 물어서 배우기로 유명하신 분이다. 해인사 조실이셨던 효봉스님과의 일화, 그리고 성철스님과의 일화등등이 아직도

스님들 사이에서 회자 되고 있었다.

그리고 숭산스님과도 친분이 두터우셔서 80년도에 숭산스님의 초청으로 LA달마 젠센터에 가셨다.

조실을 좀 맡아 주시라는 숭산스님의 부탁으로 한달을 거기서 지내셨는데 언어소통의 문제로 그냥 한국으로 돌아 오셨다. 그리고 지금도 불조를 한번에 잡아먹을수 있는 눈밝은 사자새끼를 기다리신다고 하셨다.

큰스님들을 뵈면 항상 똑 같은 느낌을 받는다.

첨엔 큰스님이라 하셔서 약간 긴장하게 되지만 역쉬 만나뵈면 누구보다도 따뜻하고 편안하게 대해주신다는 점이다.

묵언표를 달고 참선을 했다. 새벽 2시 40분에 새벽예불을 하고 3시부터 5시까지 참선하고 6시에 아침공양을 하고 운력하고 8시부터 10시까지 참선하고 10시45분에 사시마지 그리고 점심공양.

2시부터 4시까지 참선 5시 저녁공양 그리고 7시부터 9시까지 참선하고 잠자리에 들게 된다.

여러 보살님들과 거사님들은 모두 몇십년간 참선을 해오신 분들이라 움직임도 없고 게으름도 없었다. 할머니들이셔서 몸이 안좋아서 많이 빠지시진 않으실지 생각했는데 나의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정신력이 너무 너무 강하셨다.

큰 격려가 되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나의 이 화두는 고등학교때 부터 줄곧 잡아온 화두이다.

숭산스님을 만나기 훨씬 이전부터, 현각스님을 만나기 훨씬 이전부터.

고등학교 졸업기념 책자를 만들때 모두들 돌아가면서 한마디씩 적는 난이 있었다.

거기에 나는 '진정한 나 자신을 찾읍시다' 라고 적었다.

언제나 뭔가를 하고 있었지만 내가 하는것이라고 하기 보다는 무엇을 위해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었기 때문이었다. 대학을 가기위해 공부를 했고, 취직을 하기위해 좋은대학을 선택 해야 했고, 좋은 남자를 만나기 위해 예쁘게 꾸미고 다녔고, 회사에서는 인정받기 위해 열심히 일헸고, 등등등

하지만 그렇게 하고있는 나는 과연 누구 인가? 누구인가?

정말 궁금하고 궁금했다.

참선하는 동안 이 의문이 가득차고 밥생각도 별로 없고 잠도 오질 않았다.

시간만 나면 참선시간 이외에도 가서 참선을 했다.

3일정도 지나서 참선시간 외에 혼자서 참선을 하고 있는데 큰스님께서 선방에 들어오셨다.

"밥은 묵고 하나?" 하고 물으셨다.

"예 스님" 대답하니

"밥은 꼭 묵으래이, 3끼 꼬박꼬박 묵고 하래이" 하셨다.

그때 갑자기 뭔가가 가슴속에서 벅차오르면서 눈물이 났다.

지켜보지 않으신줄 알았는데 모두다 세심하게 살펴주시는 마음에 감사드렸다.

큰스님께서는 지금 83세 이신데도 법문하러 가실때 이외에는 우리와 항상 함께 참선을 하신다.

참선을 하고 하고 또 하고 나에게 끊임없이 내가 누군지 물어댔더니

머리가 아팠다.

상기가 시작되었다.

머리통에 큰 머리띠를 조으는듯이 머리가 아프고 이마엔 내친구 뽀도락지들이 나기시작했다.

누고, 도대체 누고...,

그러던 어느날 저녁 참선시간이었다.

오장육부가 요통을 쳤다.

배의 왼쪽 부분에 뭔가가 두두둑 끊어지는 느낌이 들고 가슴이 펴지는 듯 하드니,

우주와 내 몸둥아리와 하나가 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냥 가만히 즐겨 봤다. 그러자 온몸이 떨리면서 어떤 바람이 몸속에서 휭불면서 지나가서 가슴 폐를 통해 콧구멍으로 서늘한 바람이 쑥 나왔다. 막혔던 코가 뻥뚫리면서 몸이 그렇게 편할수 없었다.

그리고 그 편안한 상태로 밤이 훌쩍 지나가 버린것이다.

다음날도 편안하고 다음날도 편안했다.

참선을 하고 있으면 어떤 보이지 않는 기운이 나를 감싸는 듯했다.

방을 함께 쓰는 사람이 한의사였다. 선원에서 자고 새벽에 참선을 하고 한의원가서 일하고 있었다.

30살의 여자분인데 나랑 체질과 체형도 비슷하고 생각도 비슷하여 친하게 지냈다.

그분이 말씀하시길, 몸속에 쌓인 음기운 즉 탁한 기운이 빠져 나가는 현상이 그렇다고 했다.

아닌게 아니라 몸이 참 가벼워지고 잘 움직였다.

선원에서 참선하기 가장 좋은 시간은 역시 새벽이다.

새벽 3시부터 4시 보다도 나는 4시부터 5시가 좋다.

그 사이에 동이 터온다. 까맣던 하늘이 점점 새벽이되면서 동이터오면 내 몸도 깨어나는듯 하다.

그리고 5시 참선이 끝나면 포행을 한다. 새벽안개가 온몸을 감싸면서 하늘 산 들 나가 하나가 된다.

개울길 따라 물소리 들으면서 동네 한바퀴 돌고 나면 아침공양시간이다.

공양은 거의다 선원에서 키운 상추, 오이, 가지 등등으로 자연식을 한다. 맑고 신선한 공기를 듬뿍 마시고 맑은 음식들을 먹으니 맛은 물론이고 어찌 몸속의 나쁜 기운들이 힘을 낼수 있으랴.

그리고 운력시간이다.

입승스님이신 대승스님께서 거의 농사를 담당하시는데 가끔씩 참선을 빠지시고 농사일을 하신다.

농사란 그때 그때 작물들의 때에 맞추어서 하는 것이지 내가 시간될때마다 하는 취미생활은 아닌것 같았다. 안거 초반에는 주로 씨 뿌리기 운력을 했다. 고랑을 만들고 비닐을 씌우고 구멍을 뚫어서 들깨씨, 참깨씨를 뿌렸다. 그리고 고추밭에 김을 매는 것이었다.

하루하루가 다르게 채소들은 수욱수욱 자랐다. 채소가 자라나면 보살펴야 할일들도 늘어났다.

들깨들의 키가 자라면 넘어지지않게 끈으로 둘러야 되고 가지는 잎이너무 크면 햇볕을 가려 가지가 자라지 못하게 하니 큰잎들을 끊어줘야 하고 고추도 키가 크니 한그루 한그루 고추대에 끈으로 묶어야 한다. 완두콩도 다 익어서 수확하여 콩을 까서 밥에 넣어 먹었다. 감자는 아주 빨리 자랐다. 감자를 캐는것은 보물을 캐어내는듯 하여 아주 재미 있었다 감자캐다가 뱀도 한마리 봤다. 녹색의 뱀인데 지가 더 놀라 도망을 갔다. 녹색은 독이 없는 뱀이라 아주 속도가 빠르다 했다. 독이 있는 뱀은 갈색 밤색 검은색등 어두운색인데 독이라는 무기가 있어서 사람을 봐도 도망치지 않고 꼿꼿이 몸을 곳추세워 사람을 공격할 태세를 갖춘다 했다. 어쨌던 갓캐낸 햇감자를 쪄먹으니 정말 맛있었다. 땅의 온기운을 먹는 듯 했다.

"꼬마야 이리와바라." 큰스님께서 부르셨다. 스님은 나를 꼬마야 하고 부르셨다.

큰스님께서도 함께 운력을 하신다.

"이거 딸수 있겠나?" 하시면서 솔잎 새순을 따 보이셨다.

큰스님과 솔잎 새순을 땄다. 책에서 스님께서 혼자 토굴에서 정진하실때 솔잎만 먹으셨다는 구절이 생각나서 여쭈어 보았다.

"스님, 솔잎만 먹고 정진하신적이 있으시죠?"

"그랬지 2년간 산에서 솔잎만 먹은적이 있지. 그런데 나는 솔잎만 먹으니깐 변이 나오지 않아서 가끔씩 호박잎도 먹고 머구도 먹고 했지. 그랬더니 나오데." 하셨다.

그리고 솔잎을 다 따고 나자

"일 시키서 미안하데이." 하셨다. 큰스님은 이럴것이다 하는 나의 선입견을 산산히 부수어 주신다.

동의 보감 허준으로 유명한 이곳 산청은 약초들이 온산에 즐비하다.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듯이 허준의 선생님인 류의태도 마찬가지이고 허준도 그렇고 산청의 이 환경이 그 두분을 명의로 만들었다는 말이 있단다.

나의 룸 메이트도 서울 사람인데 산청 덕산에서 한의사를 하는 선배의 권유로 내려와서 한의사를 하고 있는데 아주 행복해 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러 절들을 다니면서 옛부터 전해내려오는 전통 의술들을 스님들로 부터 배우러 다니곤 했다.

함께 방을 쓰면서 나도 많은것을 배우고 나의 몸에 대해서도 인식이 많이 달라졌다.

몸의 원리를 알면 병은 잘 오지도 않고 병이란 것은 병원에서 진단을 받는 순간 병이 된다고 했다.

우리의 몸은 하나의 소 우주이다. 우리생각이 미치지도 않고 미칠수 없는 엄청난 우주이다. 그리고 몸은 각각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이루어져 있는 유기체 이다.

그래서 건강한 몸에는 어떤 병균이 침투를 해도 자체적으로 다 정화를 하고 치유를 해 내는 것이다.

몸의 원리를 알면 그리고 어느정도 심하지 않는 병들은 몸에게 맡기면 스스로 치유를 하는데 우리들은 지렛 겁을 먹고 무조건 병원으로 달려간다.

그러면 안과 내과 외과 이비인후과 등등의 병원에서 각각 주사주고 약주고 심한부위는 짤라 버린다.

어떤경우는 그것이 도움을 주지만 몸의 치유 능력을 저하시켜버려 점점 약에 의존해야 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몸이라는 하나의 유기체를 조각조각 따로 움직이는 기계화 해버린다.

지난번 안거동안 나도 허리가 많이 아팠었다. 침도 맞고 약도 먹었는데 별 소용이 없었다.

이번에 나는 우선 참선 자세를 바로 했다. 허리를 쭈욱 펴고 허리의 만곡을 만들어서 앉았다. 그리고 엉덩이 밑에 작은 베게를 깔고 앉았었는데 그것은 오히려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해서 그냥 방석에 그대로 반가부좌를 해서 앉았다.

첨에 바뀐 자세 때문에 허리가 더 아픈듯 하더니 하루 하루가 갈수록 익숙해지고 허리 통증도 없어졌다.

그런데 허리가 나으니 이번엔 상기된 나의 머리였다.

육식을 끊은지가 2년이 되었는데 육식을 끊은후는 확실히 기력이 좀 약해진듯했다.

기력이 없으니 더욱더 상기가되는듯 했다.

그런데 룸메이트 지영씨가 책을 한권줬다. 김철씨가 쓴 '몸의 혁명'이라는 책이었다.

그책엔 가슴과 허리를 활짝펴고 살면 우리몸의 병 90%는 다 자연 치유 된다고 적혀 있었다.

첨엔 반신반의 하고 읽었다.

우리몸의 중 가장 중요한 뇌를 온몸에 연결시키는 목의 경추뼈, 척추뼈, 요추뼈만 바른 자리에 있으면 병이 없다 했다. 그러나 현대인 대부분은 컴퓨터, 오래 앉는 일 등등 으로 자세가 다 삐뚤어져 있고 삐뚤어진 자세는 우리의 신경과 근육을 눌러 신경계문제를 일으키고, 바르지 못한 굽은 자세는 오장육부를 제자리에 있게 못하여 따뜻한 성질의 위장과 차가운 성질의 폐가 만나 서로 제 기능을 못하는 등등의 부작용이 생긴다고 되어 있었다.

설마 하면서 나의 목의 경추 뼈를 찬찬히 한번 만져 보았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요추뼈가 조금 돌아간것은 알고 있었지만 경추뼈 7개 가운데 아랫쪽 2개가 약간 중앙에서 왼쪽으로 나와 있는 것을 처음 발견했다.

지영씨에게 한번 확인을 부탁했더니 정말 2개가 제자리에서 이탈을 해 있었다.

그래서 내가 숨을 쉬면 항상 왼쪽 콧구멍이 막힌듯 하고 머리의 왼쪽부분은 뭔가 원활히 돌아가지 않고 답답했었던 것이었다. 이번에 경험했던 나쁜기운이 빠져나가는 것도 오른쪽 콧구멍으로만 나갔었다. 왼쪽이 막혀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는 책보고 목 운동을 했다. 걸을때도 도리도리를 하고 그 뼈 2개를 중앙으로 힘을 좀 가했다. 뼈역시 제자리 가고자 하는 성질이 있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날 포행하면서 습관처럼 목운동을 하는데 '우두두둑'소리가 나면서 뼈들이 제자리를 잡았다. 아 그러자 갑자기 두 콧구멍으로 숨이 크게 쉬어지면서 머리가 시원해 졌다. 마치 막혔던 호스가 뚫린듯이 시원했다. 그렇군 그렇군을 되뇌이면서 내몸의 작용에 놀랐다.

그리고 몸과 마음이 하나라더니 숨이 잘 쉬어지니 마음도 편하고 지끈거리던 머리가 시원해 지니 세상이 달라보였다.

자세를 항상 바르게 하고 다니는 소중함을 절실히 느꼈다.

그리고 소화가 잘 안되던 내가 자세를 바르게 하고 지영씨가 갖다준 쑥뜸을 몇일 연속했더니 3개월간 한번도 배탈이 난적이 없었다.

몸에 대한 애착을 갖자는 생각이 아니라 그동안 이 귀한 내몸에 내가 너무 무관심 했고 예쁜옷 입힐줄은 알고, 맛나는것 위 생각 안하고 입만 만족시키다가 위장 탈나는것도 몰랐고 눈에 보이는것 뿐이 몰랐다는 반성이 들었다.

" 몸님 그동안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이제는 잠도 적당히 자고 밥도 적당히, 골고루 먹고 하여 우리가 언제 헤어질지 모르지만 헤어지는 그날까지 잘 관리 할께요. 한번도 불평하지않고 건강 발란스 맞출려고 노력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몸에게 참회하고 화해 했다.

몸과 마음은 두개가 아니다. 를 절실히 경험했다.

 

 

 

 

산청의 하안거 3

 

산청에서의 꿈같은 하루 하루가 가고 있던 어느날이었다.

체격도 좋으시고 밥, 반찬도 아주 맛나게 잘해 주시던 공양주 보살님이 점점 말수가 없으시더니

앓아 누워 버리셨다.

원인인즉은

큰스님께서 워낙 유명하셔서 전국 각지 신도들이 많이 오셨다 가셨다 하곤 한다.

그런데 보살님들이 와서는 보시 차원적으로 다가 공양간을 들어와서 도와주시는 것은 아주 감사한데 많은 보살님들의 부엌에서 일 하시는 스타일들이 틀리다 보니 100명이면 100명이 자신의 노하우를 전한답시고 공양주 보살님께 이런저런 잔소리들을 많이 하시는 것이었다.

맘 좋은 공양주 보살님. 점점 할말을 잃어버리고는 자신감마저 잃어 버리신 것이었다.

당하지않은 사람, 겪어보지 않은 우리로써는 그 아픔을 짐작만 할뿐이지 본인은 정말 힘이 들었었던 것이었다.

공양주 보살님께서 누우신뒤로는 선원이 술렁거렸다. 왜냐면 당장에 밥할 사람이 없는것이었다.

그래서 몇일간은 돌아가면서 했다. 밥 전혀 못하는 나까지도 하루 담당이 되어 했다.

그런데 이런 상태가 일주일이 넘어가자 선원이 술렁거렸다.

일단 거사님들은 당번을 하지 않으시니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보살님들은 다들 공부하러 오셨는데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계속 공양을 지어야 하시니 문제가 안날수가 없었다.

첨에야 보시차원 적으로다가 그리고 수행차원 적으로다가 기꺼이 하셨지만 아무런 대책이 보이지 않자 동요 하시면서 몇분이 떠나 버렸다. 그러자 어떤 새로오신 자성(가명)이라는보살님이 공양간을 담당 하셨다. 그래서 다시 문제가 사그러 들었는줄 알았다. 그러나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새로오신 자성보살님은 스님들을 굉장히 떠 받들어 모셨다. 그런데 나를 포함한 보살님들을 아주 구박을 했다. 본인은 그냥 하는 잔소리인지 모르겠으나 말 한마디 한마디를 사람들 마음에 상처를 주었다. 어떤 할머니 보살님이 공양간에서 물을 마실려고 물을 붓다가 좀 쏟았더니 바로

"아니 그 물 누가 치울꺼예요?" 하면서 쌀쌀 맞게 말을 하여 그 할머니는 더 있으실려고 했는데

기분이 나빠 대꾸도 못하고 그날 바로 봇따리 싸서 집에 가셨다.

누구든지 어떤일을 하면 자성 보살님은 도저히 그냥 넘기질 못하고 꼭 한마디를 하는데 상대방을 기분 나쁘게 한 것이었다.

그래서 모든 보살님들이 모이면 자성 보살님의 욕을 해 댔지만 자성보살님이 공양주 하고 있으니 아무도 그 앞에서는 아무말을 못하는 것이 었다.

자성 보살님은 너무나도 부지런하고 하는 말들도 별 틀린말은 없었으나 자신만 옳고 잘났고 우리들은 다 게으르고 못났다는 생각을 하시는지 잔소리가 끊임이없었다.

게다가 그 보살님의 신장이 않좋아서 얼굴이 늘 어둡고 부어 있었다. 아니 온 몸이 부어있었다.

그분이 공양주로 애쓰시는것은 고맙지만 부디치고 싶지 않아서 정말 피해 다녔다.

그러던 어느날 하루는 묵언을 하는 나를 부르는 것이었다. 딱 걸린것이다.

"광월보살! 오늘 점심공양하고 우리 차 한잔 같이 해요."

"예" 할수 없이 대답을 했다.

점심공양을 하고나서 자성보살님을 만났다.

"사실은 내가 광월보살에게 좀 일러줄 말이 있어서 불렀어요." 하면서 이야기를 꺼내신다.

그런데 얼굴을 좀 떨고 계셨다.

이야기는 내가 묵언하는것은 좋지만 내가 사람들에게 좀 더 밝게 대했으면 좋겠다. 이런 내용의 이야기를 하셨다. 나는 묵언하면서 나만 신경쓰고 다른사람들에게 신경을 별로 쓰지 않는데

그것이 기분이 나쁘셨나보다.

그래서 묵언표를 떼고 말씀을 드렸다.

제가 지난번 교회를 다닐때는 예수님 말씀대로 살려고 애를 많이 썼었다. 사람들에게 늘 봉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겠다 했더니 내가 점점 힘이 들더라. 내가 충분한 중심과 힘이 없이 어설프게 남을 돕는다는 것은 날개부러진새가 거북이 업고 날아갈려는것처럼 어리석더라 그래서 이번 안거는

정말 큰 스님 우산 아래에서 어느 누가아닌 내가 누구인지 내 마음자리 공부하리라 마음을 먹고

안거를 들어왔다. 그리고 항상 사람들을 대할때는 자비심으로 대해야 겠지만 지금 내 공부를 위해

여기 있는 이상은 다른사람에게 피해 주지 않고 잘 할려고도 하지 않고 내일만 충실히 하고 싶다.고 말씀을 드렸다. 그랬더니 고맙게도 내 마음을 알아주시곤 나에게 여러가지 충고도 해주셨다. 그리하여 나와의 어색한 관계는 풀리게 된것이었다.

그러나 그 보살님은 아는 동생을 하나 데려 와서는 둘이 되고

거기 계셨던 비구니 스님 한분과 그분과 함께 다니는 보살님4명이 한편이되어서 보살님들의 신경을 긁었다.

서로의 골의 점점 깊어가는 것이 눈이 보였다.

자성보살님은 반찬도 점점 적게 내고 누가 좀 많이 반찬을 퍼가면 많이 퍼간다고 핀잔을 바로 했다.

어떤 공양물이 들어와도 자성보살님의 다른 보살님들에게 주지도 않고 감추고 4명이서만 먹었다.

보살님들도 어떤 것들이 있으면 그 보살님은 주질 않았다.

점점 그랬다.

하루는 여전히 보살님들께서 자성보살님 욕을 하고계시길래 그날도 나는 묵언표를 떼고 한말씀 드렸다. "몸도 안좋은 사람이 그래도 신심으로 공양간에서 애쓰는데 고맙지 않습니까?" 하고 나를 예뻐해주시는 진주 보살님께 말씀을 드렸다.

사람좋으시고 건강하신 진주 보살님께서는 내 말을 들어 주셔서인지 어째서인지

그날 저녁 자성 보살님께 "몸도 안좋은데 수고가 많제?" 하고 이야기를 하셨더니

자성보살님 왈 "맘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마세요." 하고 쏘아붙이셨다.

또 하나 배웠다. 오바하지 말자. 내 앞의 일만 열심히 하자.

그러던 어느날 자성 보살님이10일정도 공양간 일을 보시더니 더이상 몸이 아파 공양간일을 못하겠다고 선언을 했다.

그리고는 다시 돌아가면서 공양간 담당을 맡게 되었다.

이번에는 거사님들도 참여 하셨다. 나는 음식을 못하는 관계로 공양간 보조만 매일 했다.

그런데 이번엔 그동안 못먹고 그냥 참았던 울분들이 나와서인지 담당들이 공양을 너무나도 풍족하고 맛있게 정성껏 지어내었다.

그동안 공양 들어왔던 아이스크림 과일들이 썩어나고 있었다. 몽땅 꺼내 실컷 공양했다.

다들 공양간 오는 표정이 밝고 기대에 차서 왔다.

맞다. 먹는 즐거움이 우리 인생에서 얼마나 큰가?

나도 기왕이면 먹기좋게 보기좋게 음식들을 내 놓았고 저마다 있는 솜씨 없는 솜씨들을 다 발휘하였다. 그리고 공양시간이 끝이 나면 모두다 서로 칭찬 하기에 바빴다.

마치 지옥시간이 천국시간이 된듯했다.

자성보살님은 동생과 함께 첨에 몇번 공양하러 오시더니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알고 봤더니 자기 방안에다 공양간 도마 칼 등등을 다 옮겨서 자기네 끼리 곰국도 해먹고 죽도 해먹고 지내고 있었다. 몇일을 그렇게 지내더니 어느날 둘이 소리없이 떠나 버리는 것이었다.

몸고생, 마음고생하고 인정도 못받고 ....,

그러던 몇일후 비구니 스님과 함께 다니던 보살님도 떠났다.

그분들이 떠나자 보살님들 얼굴에는 웃음꽃들이 피어서 행복해 했다. 한차례의 폭풍이 지나간듯.

선원은 말이 없이 그대로이고, 큰스님도 아무 말씀없으시고 법당의 세 부처님들도 오라 가라 아무

말씀이 없으신데 사람들은 여기로 모여들고 또 떠나곤 한다.

왜그런가? 모든것이 자기가 자신을 끌고 여기로 오고 또 떠나곤 한다.

묵언을 하면서 아주 큰 공부를 했다.

상황은 언제나 변하는 것이다. 어떤 상황이 나에게 주어져도 그냥 그럴뿐인 것이다.

상황에 따라 내가 변한다면 그건 진정한 내가 아니고 또 평안을 누릴수도 없는것이다.

일을 할때는 내가 이 일을 한다는 생색 일명 상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는 무위법.

하면서도 함이 없어야 하고, 배우면서도 배움이 없이 배우라는 말씀이 가슴에 들어왔다.

모든것은 자연히 되어진다. 자연히...,

나는 과연 누구 인가?

 

 

 

 

산청의 하안거 4

 

공양주 소동이 벌어지고 얼마뒤에 38살의 어떤 보살님이 오셨다.

오시자 말자 풀뽑기 마당쓸기 등등 일을 너무 열심히 하셨다.

공양간에는 불도화 보살님이 거의 맡아서 하시고 나는 보조를 하고 있었다.

불도화 보살님은 아주 남자처럼 통이 크고 일도 굉장히 잘하시면서 별로 일같이 하지않으셨다.

공양주 보조를 해도 다음메뉴는 무엇을할까 김치가 조금밖에 안남았는데 등등의 걱정들이

참선할때 소록소록 올라오는데 불도화 보살님은 오죽하시랴.

그러던 어느날 종무소에서 일을 좀 하고 있는데 새로온 보살님이 오셔서 총무스님께 자기가

공양주를 하면 안되겠는냐고 물어보고 계셨다.

오셔서 분위기를 보니 공양주가 없는것을 알고는 지원 하고 있었다.

총무스님도 OK 하셔서 그날 저녁부터 그분이 공양주 보살님이 되었다.

불도화 보살님과 나는 다시 참선만 할수 있었다.

참 신기했다.

어떤사람에게 힘든일이 어떤사람에게는 원하는 일이 되고

또 사람들이 다 떠나도 새로이 사람들이 오는 일들이 참 신기했다.

우리는 모두 다를 뿐인 것이었다. 다른사람이고 좋아하는것도 다르고 싫어하는것도 다를뿐이었다.

나는 이게 좋은데 왜 너는 이게 싫으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다르기 때문이고 그것만

인정하면 세상에 시끄러울 일은 없을꺼 같다.

무엇이 좋고 싫은 것은 우리가 자라온 환경이 다르고 해온 일들이 다르기 때문이다.

나에게 오는 모든것들을 좋고 싫은 구별없이 하나씩 받아서 살펴보면 단지 다른 일일뿐인것이다.

좋고 나쁨의 구별도 사실은 특정한 기준이 없는 것이다.

내가 좋은것이 남이 싫을수도 있고 남이 싫은것을 나는 좋아할수 있고.

서로를 존중한다는 것이 서로를 인정한다는 것이 아닐까?

큰스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새벽별을 보고 깨우쳤을때 그 새벽별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으라고 반짝이진 않았다. 그것은 그냥 우연의 일치일 뿐이었다."

별이 그냥 그때 거기서 빛이 나는것은 별의 일 뿐 아무런 의도가 없었지만 부처님을 도운 결과를 나타 냈다.

내가 어떤 일을 그냥 하는데 그것이 남에게 도움이 된다면 그것이야 말로 자리이타(自 利 利 他)아닌가?

다시 참선을 열심히 하였다.

그간 일하는 동안 묵언을 하지 않았더니 말이 많아졌고

또 말이 많아지니 쓸데 없는 말들도 많아진듯 했다.

정구업을 해서 다시 묵언을 하려 했지만 한번 익숙해진 말들을 다시

주어담기가 참 힘이 들었다.

말을 줄이자. 말을 줄이자.

큰스님께서는 정말 바쁘셨다.

여러 방송사, 신문사에서 많은 인터뷰 요청하시면 다 응해 주시고

여러군데 법문도 하러 많이 다니신다.

큰스님께서 법문 듣는 사람의 근기에 따라 조금씩 방편을 달리 하시기도 하지만,

항상, 누구에게나 하시는 일관된 말씀 중에 하나는

"꼭 자기자신을 함 만나보래이 부모가 자식 만난것 보다, 잃어버렸던 친구 만난것보다 더

반가운기라 그기. 부처님 봐바라. 왕자로 태어나 나라도 버렸제, 부모도 버렸제, 부인도 버리고,

자식도 버렸다 아이가. 그런데 와 사람들이 3000년이 넘도록 존경하고 절하고 돈갖다주노. 그기다

자기일을 잘해서 그렇다 아이가. 자기 자신을 찾아보래이 꼭." 하시면서 신신당부를 하신다.


큰스님께서 방송에 나오시면 다같이 종무소나 큰스님 방에 모여 앉아 함께 큰 스님 법문을 들어보곤했다. 하루는 불교방송에서 큰스님의 일대기를 2부작으로 만들어서 보여줬는데 1부를 큰스님과

함께 시청했다. 19살부터 구도의 길을 걷다가 23살에 해인사에서 효봉스님께 맞아 죽을 각오로 도를 닦다가 깨우치시고 지금껏 한결같이 자신을 경책하고 사신다는 말씀을 들었다.

그리고 시청후 포행을 하는 데 갑자기 눈물이 두두둑 떨어졌다.

나는 왜 이리 중생짓을 하고 살고 있을까? 성수 큰스님은 되는데 나는 왜 안될까?

마음은 앞서지만 왜이리 행동이 따르지 않을까? 이 중생놀음은 언제 끝이날까? 하면서 서러움이

확 복받혀 올랐다.

그리고 물소리 들리는 개울가에서 엉엉 소리내어 크게 울었다. 한참 동안 눈물이 그치질 않았다.

갈것인가? 말것인가? 양도간의 결정을 하고 결정이 끝나면 가면 되는데 늘 가다가 미적거리는

이 넘은 무엇인가?

여우같은 의심이 삭삭 고개드는 이 어리석은 넘은 도대체 누구인가?

서러웠다.

'대를 쥐고 대를 찿았네.' 하는 원효스님의 말씀도 다 약올리는 소리로 들렸다.

엉엉엉

한참을 울고나니 속이 좀 후련했다. 그리고 예불하고 참선을 했다.

'도대체 니 누고?' 오늘은 협박을 해본다.

 

 

 

 

산청의 하안거 5

 

몇일전부터 공양간에 어떤 할아버지 한분이 오셔서 공양을 하시곤 하신다.

공양을 마치신뒤엔 입승스님 방문앞에 한참을 앉아계시면 수정거사님께서 모셔다 드린다.

누군가?

보살님들의 이야기가 귀에 들어온다.

그 할아버지는 올해 97세인데 일주문에서 마주보이는 빨간지붕에 나무로 만든 그림같이 예쁜집

주인 할아버지라 한다.

이 할아버지는 돈과 땅을 아주 많이 가지고 있는데, 지금 아무도 없이 혼자 그 집에서 살고 있다 했다. 동네에서 이 할아버지땅을 농사짓는 어떤집에서 빨래 해주고 밥은 이렇게 선원에서 간간히 먹고 지내고 있는데, 어떤 아르바이트 할 보살님을 한명 구하고 있다고 했다.

그 아르바이트 일이란

저 할아버지가 그 보살님에게 차를 한대 사줄테니 할아버지를 모시고 맛있는 집들 다니면서 함께 밥먹어 주고 말벗이 되어 주면 월급을 많이 주겠다는 그런 아르바이트 였다.

돈이 그렇게 많아도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고 아니 오히려 외롭고 불쌍해 보였다.

자식들도 돈 뺏으러 오는줄 알고 주위에서 누군가 친절할라 치면 돈때문에 그런다 생각하는지

사람들을 믿지 않으신다 했다.

심지어 자식이 와도 "너는 누구냐?, 왜 왔느냐?" 하고 꼭 물어보신다 했다.

그래도 절은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고 부담주지 않으니 이렇게 매일 출근하다시피 오시면서

그런 아르바이트 할 사람 좀 소개 시켜달라고 입승스님께 매일 졸라대고 계신 중이었다.

우리 큰스님은 높은 도를 가지고 계시고, 저 할아버지는 많은 돈을 가지고 계시고,

우리 큰스님께는 전국 각지에서 스님, 보살, 거사 할것없이 와서 절하고 돈드리고, 손이라도 한번

잡아볼려고 애를 쓰는데, 저 할아버지는 오시면 나이 많으신 보살님들이 절레절레 고개를 돌려 버리시면서 노망들었다고 가까이 가시질 않는다.

돈이 나쁜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감당할 이상의 것을 갖게 되면 그것은 돈이 아니라 돈의 할아버지라 해도 복이아니라 독이 되는것 같다.

저 할아버지를 보면서 큰 공부를 했다.

시간이 지나고 지나서 내가 집에 가게 되었다.

집에갈 마지막날 함께 공양간을 지켰던 불도화 보살님께서 맥주 한잔을 사주시겠다고 하셨다.

저녁7시 참선만 하고 8시에 선원 뒤에 있는 마을 가게에 가서 맥주 한잔을 했다.

'그동안 수고 많았다. 나가서도 열심히 하고 절대 떳떳하고 당당하게 살아라' 하고 말씀해 주셨다.

감사합니다. 하고 건배를 하는데 어떤 아저씨가 하얀 모시옷을 곱게 입고 들어오시더니

저쪽 구석에서 맥주 한병을 시켜서 혼자 드셨다.

가게아주머니 말씀이 이 동네 분인데 서울에서 사신다 했다.

화통한 불도화 보살님 " 혼자 오셨으면 여서 같이 드시지예." 하시니 얼른 오신다.

그리고 이것 저것 물어보신다.

"여서 무슨 공부 하나요?. 얼마나 내고 하나요?, 여기 끝나면 어디로 가나요?, 무슨일을 할수 있나요? "등등 궁금한것이 아주 많은 아저씨였다.

불도화 보살님은 불교에 관심이 많으신 분이군 생각하시고는 열심히 우리가 왜 마음공부를 하며

어떻게 하는것이 진정으로 남을 돕고 나를 위한 것이며 등등 큰스님의 이야기 까지 하면서

목이 아프도록 설명을 해 드렸더니

" 그럼 여기다 투자하신 돈들은 어떻게 회수를 하나요?" 하는 그 아저씨의 기막히 물음이 돌아왔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분은 유복하게 자라나서 고등학교를 서울서 나온후로 계속 장사를 하신 것이었다.

그런데 첫번째 장사가 다방이었고 두번째부터는 여관을 하셨는데 그것도 서울 조계사 앞에서 하여

스님들과 보살들의 부적절한 관계를 많이 경험하셔서 불교에 대한 나쁜 선입견을 머릿속에 꽉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불교를 하나의 비지니스로 밖에 보지 않으셨다.

"3달간 투자 하셨으면 그것을 회수하고 또 이득도 남겨야 되지 않겠어요?"

하시면서 우리를 아주 세상물정 모르는 이상주의자로 생각하시는 것이었다.

불도화 보살님과 나는

"예,예."하고 마무리 짓고 가게를 나왔다.

부처님께 참 감사를 드렸다. 그리고 이런 불법을 만날수 있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큰 코끼리의 엉덩이만 본 사람은 엉덩이만 보면 그것은 코끼리라 이야기 할것이다.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 아니 적어도 나는 환경의 지배를 받고 싶지는 않다.

내가 본것이 모두다 라는 아만심이 자신을 작은 틀에 구속을 하는 것이다.

저분이 본것도 승려들의 일부이긴 하지만 그 외의 진짜 알맹이는 보지도 느껴 보지도 않고

단정을 해버리는 것이다.

나도 그렇게 많이 했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다라는 생각을 하고

내가 대단한 사람이나된듯한 착각도 하고 그런 속임수에 놀아나도 보고 또 그 뒤의

큰 아픔도 느껴 봤다.

안거 지내고 나가는 날까지 관세음보살님께서 나타나서 나에게 교훈을 주신다.

겸손해라. 니가 아는것이 다가 아니다.

선입견과 편견을 버리고 부딪치고 경험해보아라.

언제나 그릇을 비워라.

버려라

버려라

니가 니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그 생각 마저.

집으로 돌아오는날.

나는 그대로 나였다.

아직도 내가 누군지 못찾은 나 그대로다.

하지만 달라진 것이 하나 있다.

관찰의 힘이 커 진듯하다.

내업신이 하고싶은것이 무엇인지 한발 뒤에서서 나를 관찰 할수 있는 힘이

생긴듯 하다.

큰스님께서 주신말씀 하나

'법대로 살아라이. 법이라는 것은 法 한자를 보면 알듯이 삼수변이 물을 뜻하고 去는 간다는 뜻이다 물이 가는 데로 사는 것이 법인 것이다.'

니 정신을 잃어버리지 말고 순리대로 살아라

성수 큰스님 감사드립니다.